혼자 놀기의 달인

by 밀도

드디어 나의 19호실을 찾았다. 직장 말고 집 말고 갈 곳 없어 헤매던 맹인의 도피처다.

시립도서관 내 장애인실에 입장했다. 처음 방문했을 적엔 사용하는 이가 없어 열람실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웠다. 수용성 99% 우호형 성격의 소유자가 전에 없이 시청 민원을 제기했다. 열람실 꼴이 회복됐다. 허겁지겁 그곳에 진입하고 싶었으나 기다렸다는 듯 코로나가 퍼졌다. 모든 업무가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도서관 출입이 다시 막혔다. 꼬박 2년 넘게 기다렸다. 최강소심 맹인은 활동지원사와 도서관 건물 구조를 탐색했다. 흰 지팡이를 들고 몇 걸음 안 되는 로비를 일곱 번 정도 왕복했다. 화장실 위치를 익혔고, 장애인실 출입문 찾기를 연습했다. 데스크에 앉은 직원들이며 어린이 자료실 이용자들 시선이 모조리 내 몸에 꽂히는 것 같아서 뒤통수도 앞통수도 따끔거렸다.

오롯이 내 독서 소리로만 채울 수 있는 감격의 공간이다. 생활 소음 없는 축복의 방이다. 방해받지 않는 안전한 이곳에서 책 속으로 다이빙!

나의 독서 세계에는 많은 작가들이 살고, 말하고 연결된다. 침을 튀기며 성토하기도, 찰지게 욕설을 내뱉기도, 폼나게 담배를 피워 물기도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지옥에 떨어진 주인공이 관통하는 사건 사고에 한 바탕 같이 휩쓸리고, 업세이를 읽을 때면 생소한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호기심 반 감탄 반으로 정신없이 문장과 행간을 곱씹는다. 멈춘 비행기 승무원 우은빈 작가는 브런치 앱에서 눈여겨봤던 ‘날아라 돼지’가 맞았고, 일간 이슬아 발행인이자 헤엄출판사 대표인 이슬아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정의당 국회의원 장혜영 후원회장이 되어 정치판에 입문했다. 『어른이 되면』이란 책에서 난 장혜영을 처음 알았고, 그녀에게 한 살 어린 발달장애 동생이 있다는 사실과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주장하게 된 연유를 낱낱이 읽었다. 목소리 비슷한 자매의 탈시설 생존기를 클라우드 펀딩하여 독립영화로 제작한 장혜영도 그녀 정치 후원회장이 된 이슬아도 나 혼자 반갑고 친근했다. 그뿐인가?

『아무튼 떡볶이』 저자 요조와 이슬아가 친구 사이임을 방송을 통해 알았다. 요조와 장강명이 진행한 도서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슬아와 양다솔이 친구였고,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쓴 양다솔은 요조, 장강명 팟캐스트 제작진이었다. 청각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길은 학교다, 반짝이는 박수소리,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등을 쓴 이길보라 감독 역시 이슬아, 양다솔과 같은 글방 출신 동무였다. 사납지만 따뜻한 소설을 쓰는 작가 최진영 소설집 『겨울방학』 추천사는 이슬아가 썼고, 『쓰기의 말들, 다가오는 말들, 크게 그린 사람』 저자 은유와 이슬아는 페친이며, 창비 라디오 책다방 진행자였던 황정은은 『일기』라는 에세이에서 과거 뼈아픈 상처를 고백했다.

EBS 책으로 행복한 열두 시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던 김민정 시인은 센 언니 포스 그대로 『문장의 소리』 라디오를 진행했고, 난다출판사 대표로 애정하는 황현산 시인 책을 옹골지게 엮어냈다. 넘사벽 스토리텔러 정유정 선생은 지승호와의 대담집에서 내 에세이 한 편을 언급해『』 주셨고, 『판사유감, 개인주의자선언, 최소한의 선의』를 쓴 문유석 판사는 전업 작가로 전향하여 흥미진진한 법정드라마 두 편을 선보였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에 로션을 바를 때, 장례지도사 양수진이 쓴 『이 별에서의 이별』을 떠올린다. ‘고인의 피부에는 로션이 스미지 않아 특수 제작된 화장품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는데, 난 이렇게 하루 두 번 생명을 실감하는구나. 거울 못 보는 여자여도, 반복된 일상 속에 찌든 피로마저 익숙해도 내 세포가 살아 숨 쉬며 이렇게 로션을 흡수해 주는 것부터 감사해야 할진대….’

전안나 작가에게 신간을 받았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제목이 의아했다. 독서토론 진행자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초등 엄마들의 독서 멘토로, 연봉 1억을 달성한 유능한 워킹맘이었다. ‘김주영이었구나. 친부모를 모른 채 가면 쓴 양부모 학대 속에 자랐구나. 부잣집 외동딸을 연기하면서 무려 27년을 견뎠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안나 작가에게 책은 노인의 바다와 같은 은신처요, 마지막 생존 비방이었겠구나.’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는 김주영 고백에 전율했다. 삶으로 독서의 힘을 증명한 그녀 의지는 나약한 내 멘털을 주섬주섬 동이게 했다. 불평불만으로 푸념만 일삼는 게으른 맹인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회초리 없는 회초리다.

책은 나의 협소한 사고 스펙트럼을 확장시킨다. 울창한 숲처럼 내 영혼을 싱싱한 피톤치드로 충전시킨다. 고요히 읽고 쓰는 시간, 짧은 생각이 가지를 친다. 성찰과 반성이 어리숙한 나를 자라게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저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