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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May 10. 2024

때로는 비공개여도 좋을…

1차 고사 마지막 날이구나.

이료재활전공과 성인 학생들이 맹학교 들어와서 첫 시험을 치른 거야.

볼 수 없으니 시험지를 읽을 수도 답안지를 작성할 수도 없잖아.

촉각문자인 점자는 이제 두 세 음절 단어를 간신히 해독하는 정도고.

이것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들이라 가능한 거거든.

 점자도 일반 활자도 접근이 안 되는 성인 학생들은, 그래서 대필, 대독 도움이 필요해.

 누나 대학 다닐 때 시험 기간이면 대필자 구하느라 고생했었는데….

학과 사무실 게시판에 대필 봉사자 구인 광고를 써놓기도 했고, 친구들이며 선배들이 참 많이 도와주셨어.

조그라미 누나도 한몫했었지.

그 시절, 누나도 사람 아니고 기계로 시험칠 수 있었다면 풍신난 내 에너지를 시험 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적어도 기계 앞에서 민망하거나 창피해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성적표야 혼자 확인하면 그만이지만 모르는 문제 앞에서 당황하는 내 꼴을 누군가 낱낱이 구경한다고 생각해 봐. 

이건 이불킥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 눈동자 생각해서 공부 열심히 했으면 됐지 않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요즘 장애대학생들은 학습·생활도우미가 필요에 따라 각각 한 명씩 붙는다더라.

누나 직장에서 근로지원인 도움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의 복지시스템이지.

얼마나 감사한 제도니.

 우리 1학년 만학도들이 처음으로 대독, 대필로 시험 치는 모습, 곁에서 보고 있자니, 너무 멋있는 거야.

엄숙한 공기 속에 타인이 읽어주는 문제 듣고 서술형을 말로 풀 때 그 뻘쭘함이라. 

느낌 아니까.

객관식의 경우 보기가 길면 반복해서 읽어달라기 미안해서 대충 넘기게 되기도 하거든.

국가고시는 그래서 문제지와 음성 파일을 같이 제공해 준단다.

누나 수능칠 때는 카세트테이프였구나.

 시험에서 해방된 기쁜 날.

독립 보행이 가능한 저시력 학생들은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벗어났어.

그런데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전맹들은 하교 스쿨버스가 나가는 시간까지 얌전히 기다릴밖에.

남은 학생들 안마 연습도 하고, 빈교실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어.

“흰 지팡이는 꼭 지니고 다녀야 한다더라.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와이프인 줄도 모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더라.

생명공학이 발달하고 AI 기술이 진화되다 보면 눈 뜰 날도 오지 않겠느냐.”

 ‘소리 없는 눈이 나를 구경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찜찜한 부담만 덜어낼 수 있어도…’

누나 눈은 타인을 구경할 수 없으니 아무래도 불공평한 게임이잖아.

사생활 보호에 취약한 시각장애인의 비자발적 공개형 인생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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