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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n 18. 2016

고독한 책읽기-3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곳곳에서는 국가 간, 혹은 국가 내부의 전쟁이 진행 중이다. 엄밀한 의미로 한반도 역시 전쟁을 '쉬고' 있을 뿐 끝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도처에 널린 전쟁은 흔히 남자들의 것으로 여겨지고, 수많은 전쟁 문학과 영화는 남성의 관점에서 겪은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단 하나, 이 책을 빼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허구를 다룬 소설이 아닌 실존 인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긴 르포에 가깝다. 아니, 르포라고 조차 말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아마도 어떠한 종류의 가공도, 의도도 없어 보인다. 그저 200여 명의 여성들이, 의사로, 위생병으로, 세탁 병사로, 전차부대 운전사나 심지어 전투기 조종사로 참여했던 자신들의 전쟁 이야기를 쏟아부었고,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성실하게 그녀들의 도구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의 페이지를 넘어갈 때마다 나는 종종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지속해서 읽기조차 힘든, 그러나 다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는 이 책을 써 내려간 저자의 인내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연락을, 자신들의 목소리를 기록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단에 바쳐진 희생물이 되듯이 온전히 자신을 바쳤을 저자에게 노벨문학상이 충분한 경의가 되었기를 바라지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 전쟁 속에서 길을 잃었던 그녀들의 삶에는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야간 당직을 서는 날이라..... 중환자실에 들렀어...... 대위가 누워 있더군...... 당직 들어오기 전에 다른 의사들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미리 귀띔해준 대위였지. 아침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나는 '그래, 좀 어때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라고 대위에게 말을 건넸어. 그러자 평생 잊지 못할 대답이 돌아왔지...... 대위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가운을 벌려서...... 당신 가슴을 보게 해줘요...... 아내를 못 본 지 하도 오래돼서......' 아직 입맞춤도 못해본 처녀에게 가슴을 보여달라니...... 너무 당혹스러웠어. 대위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지.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병실로 돌아갔어. 하지만 대위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어. 환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처참하고 끔찍한 순간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 순간들조차 여성들은 엄마를 그리워하고,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입지 못할 원피스를 만든다. 뭔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끝없이 놓지 않으려 애쓰며 전쟁 한가운데를 관통해 간다. 비록 전쟁의 비극이 그녀들을 피해가지는 않았지만 여성이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고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담담히 기록할 뿐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식의 어떠한 의도도,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을 크리슈나 무르티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평가가 들어가지 않은 관찰은 인간 지성의 최고의 형태다" 성실한 기록으로 이름 없었을 이들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준 이 책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실은 전쟁을 겪는 것은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겪은 최대의, 최악의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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