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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Oct 09. 2016

나의 산티아고記-21

You don't choose a life, you live one.

day19. 베르키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27km

이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영화 'The Way'의 시작은 이렇다. 아들은 안과의사인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가 되기 직전에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이자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은 상실감에 빠진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만 참으면 박사, 교수가 될 수 있지 않냐며 공부를 계속하라고 하지만 아들은 듣지 않고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세상을 직접 보고 싶어요"라며 여행을 떠난다. 긴 여행 후 잠시 돌아와 이번에는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겠다고 하고, 그 아들을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말했다. "네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난 내 인생을 선택했다." 아들의 대답은 이랬다. "인생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사는 거죠. You don't choose a life. you live one." 그리고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조난을 당해 숨졌다.


만시야를 향해 가는 길에 바로 그 구절을 만났다. 누군가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써놓은 글귀를 보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과 깊은 공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에서는 종종 그런 느낌을 받는다. 만나는 순례자들과 몸과 마음의 고통을 나누며 공감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심지어 만나지 못한 이들 조치도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들, 길가의 십자가에 남긴 소지품들과 쌓아 올린 돌무더기, 무수한 발길에 맨살을 드러낸 슾길에서도 그들을 느낀다. 그런 깊은 공감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중세의 순례자들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 그리고 기쁨을 다시 경험하는 듯이 느껴질 때조차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길이 오랜 세월 순례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가 아닐까.


길에서는 많은 표시, 메시지와 구호도 만날 수 있다. 세월호 리본도, 나무로 엮은 십자가도, 사랑의 고백도, 격려의 문구도 있었다. 심지어 티베트의 국기도 볼 수 있었는데, 가장 재미있었던 것 중 하나는 'go vegan'이라는 문구였다. 아마도 열렬한 채식주의자의 소행일 테지만 채식을 하는 나 조차도 반복되는 그 메시지가 지겨울 무렵 바로 밑에 쓰인 다른 메시지를 발견했다. 'go carnivore' 카미노에도 역시 세상의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day20-21.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레온:20km

드디어 레온이다. 출발지였던 생장에서 471km. 전체 여정의 60%를 왔다. 남은 거리는 313km. 모처럼 대도시에 온 만큼 구경도 하고 지친 몸도 쉬어가기로 순진 씨와 의기투합했다. 발바닥과 발가락의 물집이 딱 한번 생겼다가 며칠 후 사라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무릎의 통증도 줄어들었지만 며칠 전부터 종아리의 근육이 전기가 통하듯이 당기는 느낌이 들어서 제대로 이완을 시켜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살면서 얼굴보다 발에 이렇게 신경을 쓰기는 처음이라고 했지만, 순례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끝까지 순례길을 걷게 해 줄 몸, 그중에서도 다리와 발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매일 발을 잘 씻고 바셀린을 바르고, 아픈 무릎엔 파스나 호랑이 연고를 발라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등산화를 벗고 공기를 쐬어주곤 했다. 다행히 이때쯤에는 중간중간 신발을 벗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적응이 되어 있기는 했다. 


그래도 한 번은 호텔에서 욕조에 몸을 담가보자는 소망으로 과감히 알베르게 표시를 지나쳐 레온 성당 근처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몇 군데를 들른 후 결정한 곳은 욕조와 스파가 있다는 깨끗한 호텔로 숙박비는 60유로였다. '스파라니!!' 알베르게에 비하면 엄청나게 비쌌지만 다행히 순진 씨와 둘이 나누어 내기로 하고 방을 잡았다. 그러나 스파를 이용하려면 수영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짐을 푼 후였고, 어차피 꼬질꼬질 시커멓게 탄 몰골로 스페인 관광객이 가득한 스파에 갈 용기도 없었기에 욕조 목욕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스파가 있느냐고 확인하는 우리를 바라보던 호텔 직원의 표정이 묘해 보였던 것은 자격지심인가.

레온 성당에서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HOTEL이라고 쓰인 곳이 우리가 묵었던 곳이다.

첫날은 호텔에서, 다음날은 다시 알베르게에서 이틀을 레온에서 머물며, 성당 구경도 하고 그전에는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냈던 문어와 홍합요리도 먹는 사치를 부렸다. 걸어오는 길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썼던 엽서를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잠깐이지만 순례자가 아닌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노곤한 몸과 마음, 그리고 나른한 하루. 레온에서의 휴식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2015년 9월도 끝이 났다.

비쌌지만 정말 맛있었던 문어 Puipo 요리
레온 성당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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