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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Oct 13. 2016

나의 산티아고記-22

day22.레온-산 마르틴 델 카미노:26.5km

10월의 첫날, 이른 새벽길을 나섰다. 이틀 동안의 휴식으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카미노에서는 어설프게 초반에 휴식을 취했다가는 다시 걷는 것이 힘들어진다는 충고를 받게 된다. 그런 말을 들어왔던 터라 힘들더라도 매일매일 걸으려 노력했는데, 중반을 넘어선 휴식은 참 달콤했고, 그 이후의 여정에도 다행히 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제 걸어온 길보다 남은 길이 더 작은 상황, 줄어드는 거리가 어떻게 생각하면 점점 아깝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날의 목적지는 산 마르틴. 조금은 휑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순례자들이 없다면 유지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마을들이 있는데, 산 마르틴도 조금 그런 느낌이었다. 민가는 별로 보이지 않고 건물들도 띄엄띄엄해서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두 군데 알베르게를 지나쳐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건물은 오래돼 보였는데, 마치 시골 학교를 개조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그냥 그랬지만 대신 햇빛이 잘 드는 야외 빨래터와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마당이 있는 곳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낮잠시간인 시에스타가 시작하기 전에 가게를 다녀오라는 호스피탈레로의 충고를 듣고 간 길 건너 작은 구멍가게의 선반은 반쯤 비어 있었다. 간단하게 맥주와 올리브를 사서 돌아와 마당에 앉아 일기를 썼다. 유난히 시원한 바람이 지금도 기억난다. '조금 쓸쓸하지만 그래도 괜찮아'하는 느낌. 그런 기분을 즐기며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또 글을 썼다. 이렇게 끝이 났다면, 나름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을 텐데. 악몽은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침낭 안에 들어가 누워 있을 때 시작되었다.


8시 반이 넘은 시간, 대개의 알베르게에서는 9시에서 10시 사이에 소등을 하는데, 특별히 할 일이 없고, 몸이 피곤한 순례자들은 그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게 마련이다. 나 역시 하루를 쉰 후, 제법 많이 걸은 날이었기 때문에 9시도 되기 전에 잠을 청하려던 차, 가슴팍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을 뻗어보니 뭔가가 잡혔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빈대였다. 아직 피를 빨기 전인지 몸통이 작은 편이었지만, 단지 침대 위에서 발견한 것도 아니고 침낭 안에서 그것도 내 몸에서 잡았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 그동안 빈대에 물리면서도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샤워를 하고, 1-2유로씩을 들여 옷을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리는 것으로 안심하곤 했는데. 잠자리에 들 시간에 그것도 침낭 안에서 빈대를 발견하다니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가요. 이제와 빨래를 할 수도 없고, 날은 이미 추워지기 시작해서 침낭을 덮지 않고 잘 도리도 없었다. 급한 대로 침낭을 끌고 화장실로 가서 벌레 기피제를 잔뜩 뿌렸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침낭 안으로 들어가는 심정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가 된  것 같았다. 아마도 한 달이 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끔찍한 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몽사몽 잠이 들고, 그렇게 다시 아침이 오고, 조금이라도 빨리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day23.산 마르틴 델 카미노-아스토르가:23.5km

우울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이날의 풍경은 도저히 우울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스토르가를 향해 가는 길 초반에는 Way와 Road로 표시된 두 개의 길이 나온다.(way와 road의 차이는 뭘까?) 한쪽이 다른 쪽보다 1km 남짓 길다고 하는데, 그래도 무척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나의 여정은 물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지만, 짧고 빠르게 가려는 것이 아니다. 가는 걸음 하나하나 길 하나하나가 만족스럽고 행복하지 않다면 이 길을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저 도착이 목표였다면 동생이 제안한 대로 차를 타고 2박 3일로 다녀가면 될 일이었을 것이다. 삶도 그렇다. 식상하지만 그래서 길을 인생에 비유하는 것 아닌가.

순례자의 표시인 조개 껍데기를 달고 주인과 함께 걷고 있는 순례견(?)
목마름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순례자상이다

아스토르가는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당장 내게 급한 것은 옷과 침낭을 살 수 있는 상점을 찾는 일이었다. 알베르게를 찾는 일도 뒤로 미루고 스포츠 용품점을 찾아 침낭을 샀다. 예산을 초과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로 산 침낭을 들고 찾아간 알베르게에는 족욕장이 있었다. 입었던 옷들은 몽땅 빨래를 맡기고, 족욕장에 발을 담그고 피로를 푸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빈대가 괴롭힌들 어떠랴,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마침 오랜만에 만나게 된 순진 씨와 길에서 몇 번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던 문보경 샘과 함께 저녁 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가졌다. 이날의 화제는 단연 빈대 얘기였다. 그다지 식욕이 돋는 주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빈대 얘기와 더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제법 술이 오를 정도로 자리를 이어갔다. 그날 밤 우리는 이야기와 공감이 필요했고, 와인을 마셨고, 아스토르가의 밤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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