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6. 몰리나세카-카카벨로스:23.4km
예쁜 집들과 돌로 포장된 골목, 전형적인 유럽 마을이 아닐까 생각했던 몰리나세카를 출발해 카카벨로스로 향하는 길은 숲이 이어졌다. 궂은 날씨에 비옷을 입고 걸어야 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숲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다. 특별히 험한 길도 없이, 오르막 내막도 없이 휴식처럼 길을 걷고, 평판이 좋다는 공립 알베르게에 가방을 풀었다. 아쉽게도 공립 알베르게는 마을의 끝에 위치해 있어서, 짐을 풀고 나서는 식사를 하기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 마을로 들어가야 했다. 순례자에게 후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미터를 되짚어간 이유는 오는 발견한 라면 간판 때문이었다. 태극기와 함께 김치, 라면, 공깃밥이 있는 사진이 뙇!! 카미노를 걸은 이후 처음 발견한 라면과 김치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진짜 라면과 김치가 나오는 거 맞아?'라는 의심을 뒤로한 채 실패를 각오하고 주문을 했다. 한참 후 차려져 나온 식사는 의외로 그럴싸하게 한국 맛을 내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직접 담갔다는 김치도 괜찮고, 심지어 수저도 갖춰져 있다. 이게 얼마만의 김치냐며 맥주까지 곁들여 맛나게 식사를 마쳤다. 콧수염과 피어싱이 인상적인 주인아저씨와 나눈 유쾌한 농담까지 곁들인 기분 좋은 한 끼였다.
day27. 카카벨로스-트라바델로:17.1km
이 날로 600km를 넘어선다. 나보다 먼저 카미노를 걸었던 한 친구는 후반으로 갈수록 남은 거리가 아까워진다고 했었는데, 이제 슬슬 느긋해지기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기도 했다. 반드시 그래서는 아니지만 이날 여정은 채 20km도 되지 않았다. 사실은 트라바델로에 가면 짜파게티를 파는 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전날의 라면에 이어 한식(?)을 먹어보자는데 순진 씨와 의기투합한 탓이다. 지난 25일간 한식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막상 한번 맛을 보고 나니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갈 길은 여유롭지만 알베르게의 퇴실 시간은 지켜야 하므로 일찌감치 일어나서 짐을 꾸리는 것은 마찬가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즉 갈리시아 지방에 접어들수록 비가 잦아진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는 것 같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폭우를 겪은 후 한동안은 맑은 날씨였는데...
트라바델로의 알베르게는 2인실을 따로 갖춘 가정식 민박 느낌의 숙소였다. 레이스 커튼이 쳐있고, 꽃무늬 이불이 덮인 2인실을 권하는 아저씨에겐 미안하지만 우리는 2층 침대가 놓인 4인실을 선택했다. 뒤 이어 도착한 호주 부부도 우리 방에 합류했는데, 아마 주인아저씨가 비싼 2인실을 아무도 고르지 않아서 실망했을 거라며 키득거렸다. 고풍스러운 의자에서 산티아고 순례에 관한 멋진 화보집을 감상하고, 페트병만 보면 흥분하는 강아지가 있는 일층으로 내려왔더니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었다. 나름 많은 노력과 돈을 투자했을 주인아저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와인 한 병을 벽난로 가에서 마셨다. 이런 곳에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오고 가는 순례자를 맞이하고 보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카미노 곳곳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인 호스피탈레로나 사설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이들에겐 각기 사연이 있는 듯했다. 물론 카미노를 걷고 나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다른 순례자들을 돕고 싶어서 알베르게를 운영하거나 봉사하는 이들도 많았다. 카미노의 종착지였던 묵시아에서는 유고에서 경찰 생활을 하다가 순례길에 묵시아에 와서 그곳에 사랑에 빠져 알베르게를 열게 된 여자분도 만났다. 그녀는 매일매일 바다가 너무 아름답다며 해질 무렵만 되면 알베르게를 버려두고 카메라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나는 언제나 떠나는 쪽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문득 알베르게를 지키는 이들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매년 수많은 여행자가 찾아왔다가 떠나는 다람살라의 삶도 지키고 머무는 쪽일지 모르겠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