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0. 트리아카스텔라-사리아(21.5km)
이날을 기록한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베드 버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씩 소강상태+재발. 며칠째 새로 물리진 않은 것 같다.... 오늘 드디어 사리아 입성 예정. 유명한 사모스 수도원을 거쳐가는 조금 긴 길을 선택할 예정. 끝나고 나면 베드 버그도 끝나겠지."
이때까지도 베드 버그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나의 순례를 망치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오래였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공존하고 있달까. 다행히 조금씩 상태도 나아지고 있었다.
목적지인 사리아에 가는 길에는 수도원이 많은 스페인에서도 오래되고, 규모가 크기로 유명한 사모스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을 거치지 않는 좀 더 짧은 길도 있었지만 유명한 곳이라고 하니 들러 보기로 했다. 한참 힘들게 언덕을 오르고 나면 반대편 아래로 수도원이 보인다. 사모스 마을에서 생선이 들어간 엠파나다와 맥주로 식사를 했는데, 순례자보다 동네 주민이 더 많아보이는 그 식당의 음식은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우리를 무척 즐겁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수도원 경내 투어에 참석했는데, 참가비는 3유로 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가자는 나, 순진 씨 그리고 또 다른 순례자 한 명이 전부였다. 경내 투어에 참가한 숫자도 그랬지만, 수도원 자체도 점차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중세시대에는 수백 명의 수도자들이 살았다는 이 수도원은 이제 몇십 명의 수도사와 단 두 명의 수습 수도사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더 이상 종교적 열정에 삶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수도원 건물조차 온전히 관리하기 힘들 지경이 된 사모스 수도원은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한 때 신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넘쳐났던 이 공간과 시간은 이제 옛말이 된 것일까. 아직도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고 있지만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가는 수도원에서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낀다.
day31. 사리아-포르토마린(21.5km)
드디어 산티아고에서 채 100km 남지 않은 곳을 통과하는 날이다. 이날 페이스북에 100km 표지석 사진을 올리고 "어떤 사람은 뛰어서도 갈 거리"라고 적었다. 물론 아무나 뛰어갈 만한 거리는 아니겠지만 철인 삼종 경기 선수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그러나 오늘도 나는 달팽이처럼 고작해야 20km 남짓 만을 걸어갈 뿐이다. 어느 누구의 강요나 권유도 아닌 온전히 나의 의지로 말이다.
런던의 동생집을 나설 때, 동생은 "누나, 내가 차로 산티아고인지 어딘지 데려다 줄테니까 그냥 우리랑 놀다가 가."라고 해서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도 매일 아침 GPS 지도를 켜 그날그날의 목적지를 누르면, 억울하게도 이 녀석은 언제나 자동차로 이동하는 시간과 경로를 먼저 보여주곤 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오늘 오후 내가 햇빛에 그을러 가며, 퉁퉁 부은 다리로 도착할 그곳이 차를 타면 고작 30분 남짓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제 본 택시기사 아저씨가 오늘도, 내일도 내가 걷고 있는 곳까지 손님을 태우고 나타날 때는 잠시 자괴감까지 맛보는 것이었다.
그런 좌절감을 딛고 이제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채 100km도 남지 않았다. 나보다 몇 년 앞서 카미노를 걸었던 친구는 나의 페이스북 사진에 "이제 슬슬 걷는 게 아까워질 걸"이라고 댓글을 남겼다. 그랬다. 이제 고작(?) 100km면 이 걷기가 끝난다는 사실이 기다려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걸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이렇게 걷다가 삶을 마칠 수 있지는 않을까. 영화 'The Way' 주인공 할아버지는 산티아고 순례의 마지막 지점인 묵시아에서 아들의 유골을 뿌렸지만, 다음 장면에선 중동풍의 어느 나라를 여전히 걷고 있었다. 순례자의 지팡이와 조개껍데기를 가지고 말이다.
P.S. 29일째가 되던 날, 앞에서 몰려오는 소떼를 보고 무서워 도망가던 나를 붙잡고 진정시켜줬던 오스트리아 아저씨 스테판은 새해를 맞아 보낸 메일에서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길(Camino)을 걷고 있어"라고 말했다. 산티아고 순례가 끝났지만 우리 삶의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순례 때 만났던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몇 년 뒤 다시 길에서 만나곤 한다. 올해도 휴가를 받아 2주만이라도 카미노를 걷겠다고 한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순례는 끝나지 않는다.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언젠가, 어디선가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