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banii Apr 03. 2017

나의 산티아고記-27

day32. 포르토마린-팔라스 데 레이(25km)

어제 출발지인 사리아에서부터 부쩍 낯선 얼굴이 늘어났다. 카미노를 걷는 무수한 순례자들과 다 인사를 나누거나 얼굴을 익히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대충 어느 카페나 알베르게에서라도 본 듯한 이들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갑자기 새로운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산티아고 순례협회에서는 순례자들의 증명서를 발급하는 최소 거리를 자전거로 갈 경우 200km, 걸어서 갈 경우는 100km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순례 증명서를 받으려면 적어도 사리아 정도에서는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리아에서 마주친 말끔한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 단체 순례객도 그 100km를 걷기 위해 오신 분들이었다. 중간중간 이런 분들과 마주치다 보면 누추한 나의 차림새가 다소는 부끄럽고, 다소는 뿌듯하기도 했는데 뭔가 복잡한 심경이 들기도 했다. 버스를 탔다고 알베르게에서 쫓겨났던 한국 친구의 사연에서부터 배낭을 차에 맡기고 산책하듯 걷다가 한식과 소주로 회포를 푸는 단체 관광객까지 보다 보면, 대체 이 순례가 뭐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순례의 본질에 충실하겠다며 오로지 내 발과 어깨로 700km를 걸어오지 않았던가. 가톨릭 신자도 아닌 주제에.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이제 정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70km 남짓일 뿐이다. 모처럼 쭉 뻗은 포장된 길이 편하면서도 지루한 나머지 동영상 촬영 놀이를 시작했다.


day33. 팔라스 데 레이-아르수아(29.5km)

산티아고에 다가갈수록 순례자도 늘어났고, 덩달아 알베르게도 늘어나고 있었다. 순례 초반 주워들은 정보로는 순례자가 몰리는 후반부로 갈수록 숙소 잡기가 쉽지 않아 길에서 마주치는 순례자들끼리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며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고 했었는데, 내가 보기엔 순례자보다 알베르게가 더 빨리 늘어나고 있는 듯했다. 이날 묵은 숙소도 새롭게 문을 연 곳으로 평범한 2층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넓은 방 하나에 이 층 침대가 대여섯 개 배치돼 있었다. 깔끔하고 심플한, 지극히 건조한 도미토리 스타일의 숙소였다. 정취도 휴식 공간도 없지만 숙박비는 10유로였다. 역시 산티아고에 다가갈수록 물가가 올라가고 있었다.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해 먹으려고 식료품점을 찾아 나섰는데 지도에 나와 있는 곳은 문이 닫혀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고민을 하다가 길가의 카페에 앉은 스페인 아저씨에게 더듬거리는 스페인어로 물었더니 씨에스타란다. 5시가 넘었는데 웬 씨에스타? 자세히 들어보니 씨에스타가 아니라 피에스타, 축제라는 뜻이었다. 축제날이라 문을 닫은 것이다. 아마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아저씨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우리에게 다른 할아버지가 한두 블록 떨어진 곳에 문을 연 가게 있다고 말해줬다.

"어디라고요? Donde esta?" "@#%&^*)*$#&*(%##" "네. 고마워요. Si. Gracias."

순진 씨가 물었다. "언니, 알아 들었어요?" "아니, 근데 알 거 같아."

그랬다. 신기하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대충 이해가 갔다. 스페인에서 한 달 남짓 걷는 동안 귀가 트였다기보다는 눈치가 늘어난 것이 틀림없다. 사실 레온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찰에게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묻자 빠른 스페인어로 역시 "@$%(&^%($($##()"라고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하길래 "정말 고마워요. Muchas Gracias"라고 돌아서자 역시 순진 씨가 "언니, 알아 들었어요?"라고 물었었다. 그때는 "아니, 알아 들었을 리가 있어? 손짓만 봤어."라고 대답했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어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방향을 가리키는 손끝만 열심히 쳐다봤었는데. 할아버지의 설명은 꽤나 복잡한데도 알 것만 같았다. 길을 건너서, 좌회전을 한 다음 신호등을 건너서 두 블록을 더 가다가 다시 우회전을 하고... 어쨌든 축제일에 유일하게 문을 연 그 가게를 무사히 찾았다. 브라보! 나는 혹시 스페인어 천재인가.


이전 26화 나의 산티아고記-2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