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다람살라처럼 작은 동네에 오래 살다 보면 굳이 인사를 나눈 사이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대충 뭘 한다더라는 정보는 갖게 된다. 그 대상이 외국인이라면 더 그런데 로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인이나 티베트인들 입장에서는 눈에 잘 띄는 이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만해도 일하는 록빠와 집, 가끔 커피 마시러 들르는 카페 외엔 별로 가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6년이나 살다 보니 길가다가 만난 티베트인이 "나 너 자주 봤어. 저 아래 조기와라에 살지?"라고 해서 깜짝 놀란(사실은 좀 무서운) 적도 있다. 하지만, 작은 동네에 오래 살면 생기는 일이려니 할 수밖에.
반대로 나 역시 말도 안 붙여본 동네 사람들에 대해 꽤 알고 있다. 저 태국 아줌마는 요즘 절을 짓고 있고, 저 티베트 아저씨는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가 다시 재결합했고, 저 네덜란드 애는 요즘도 해시시를 하는 모양이고, 저 인도 아저씨는 맨날 술 먹고 행패를 부려서 동네에서 왕따이고 이런 이야기들이다. 그런 자잘한 동네 사람들에 관한 정보 가운데, 내게는 눈에 띄는 서양인 부자(rich 말고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키가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정도로 크고 대머리여서 자연스레 눈에 띄기도 했고, 아들이 장애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아들의 곁에는 대체로 젊은 티베트 남자가 따라다니며 돌보아 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도 없지만) 부자는 호주 사람들이고, 아들은 자폐를 앓고 있고, 아버지가 24시간 내내 돌볼 수 없어서 자신이 다른 일을 볼 때 아들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한다는 것이었다. 주로는 덩치가 큰 아들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은 티베트 남자들이 몇 달씩 그 아들의 곁을 보아주다가 자취를 감췄다. 애초에 자폐아를 돌보는 일이 서양식의 장애인 돌봄이 몸에 익지 않은 티베트 남성들에게 쉽지는 않았을 테고, 통제가 어려운 덩치 큰 성인을 줄곧 지켜본다는 것도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였다.
그래선지 다람살라의 동네 소식이 오가는 가운데 그 아버지가 아들을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가 종종 들렸다. 왠지 자신을 똑 닮은 아들을 다람살라에서 돌보며 살고 있는 그 아버지의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려는데, 아저씨와 동시에 돈을 내밀었다가 아저씨가 내게 먼저 계산하라며 양보를 해준 적이 있다. 한 손에는 지갑을 펼쳐 들고 다른 손에는 방금 꺼낸 지폐를 들고 있었는데, 펼쳐진 지갑에는 아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다람살라에 장기로 체류를 하려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정당한 비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방법은 티베트어와 불교 강좌가 열리는 티베트 도서관에 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학생비자를 받는 것이다. 전에는 비자만 받고 수업은 잘 듣지 않는 학생들도 꽤 있었는데, 인도 정부에서 출석률 관리를 강하게 지시한 후로는 비자 연장을 원하는 학생들은 수업에 꼬박꼬박 나오게 됐다.
그래서였는지, 새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된 날 그 호주 아저씨가 수업에 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새 학기인지라 그날 수업 주제는 불교 수업의 초반에 늘 듣게 되는 불교의 사성제,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관한 얘기였다. 스님의 강의 중간에 호주 아저씨가 질문을 했다. "나는 종종 내 안에서 내가 다룰 수 없는 분노를 발견합니다. 그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쉽게도 스님의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러니 내가 불교 공부를 해도 아는 게 없다는... ㅡㅡ) 하지만 언제나 친절해 보이던 그 아저씨, 다 큰 아들을 데리고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는 그분 안의 분노에 대해서 가끔 생각한다.
내가 다람살라를 떠나기 얼마 전부터 아저씨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알기는 하지만, 알고 지내지는 않은 이웃이다 보니 오고 감도 알 길이 없다. 가끔은 궁금하다. 아저씨가 아들과 함께 그 분노에서 자유로워졌을까. 아들을 돌보아줄 누군가는 있을까. 지갑 속의 아들 사진은 그대로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