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uguay, La Paloma
세찬 파도 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빗소리다.
캠핑버스는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조금 더 과장해서 들려준다.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지켜준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듯.
딱 일주일 전에도 비가 왔다.
해도 뜨지 않은 컴컴한 새벽, 갑자기 바람이 창문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남편이 조용히 나를 흔들어 깨웠다.
태풍이 올 것 같아서 새벽에 자전거 다 분리해서 넣고, 저기 밑에 주차할만한 자리도 봐뒀어. 그리로 이동할까?
순간, 바람이 비와 합세하더니 캠핑버스가 흔들릴정도로 거세졌다. 해지는 풍경을 가까이서 보겠다며 해안절벽 위에서 밤을 보내던 차였다. 팔톤이나 되는 버스가 바람에 휘날아갈리 만무하지만 머리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고, 남편에게 바로 이동하는게 낫겠다고 응답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육중한 캠핑버스에 시동을 걸더니 날렵하게 핸들을 돌려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모든 것의 안전을 확인한 남편의 움직임은 다시 느릿해졌고, 이내 침대로 파고들었다.
여보, 태풍오는거 어떻게 알고 다 준비해놨어? 그 새벽에 나가서 주차 자리까지 보고 온거야?
요새 드론 날리느라 자주 들어가는 기상 사이트가 있는데 새벽 다섯시에 태풍 온다고 나오더라고. 혹시나해서 자전거랑 다 챙겨놨지. 근데 나 좀 영웅같지 않아?
비스스 웃음 짓는 남편의 얼굴에서 흐뭇함이 쩐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럼 나 용서해주는거지?
아 맞다. 어제 우리 대판 싸웠지.
잠도 안 자고 태풍에 대비해서 만발의 준비를 한 남편이 기특해서 칭찬을 하다보니 잊고 있었다. 그렇게나 드라마같던 부부싸움도 시간이 지나 글로 옮기면 추억거리가 된다. 남편의 태풍 선방으로 인해 일주일은 갈 뻔 했던 앙금이 하루 아침에 스스르 녹아버리는 형국이라니. 그러니저러니 해도 여행동안 믿고 의지할건 이 사람뿐이지 않은가 하며 다시 하트 뿜는 얼굴을 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피리아폴리스(Piriapolis) 바닷가에서 며칠을 보내고 라팔로마(La Paloma)라는 작은 해변 도시로 이동했다.
항구 근처의 대형 주차장은 캠핑카 마을인냥 크고 작은 집들로(캠핑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낡았지만 깔끔하게 칠해진 하얀색 캠핑버스 앞으로 주차를 하자마자 집 주인으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물탱크를 채우려면 어디로 가야한다, 슈퍼는 여기가 싸다, 항구에 어디로 가면 싱싱한 생선을 살 수 있다, 이런 저런 알짜 정보들을 속사포처럼 쏘아주시기까지 하셨다.
라울은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Rosario)에 살고 계신데, 십오년 동안 여름이면 항상 캠핑버스를 이끌고 이곳으로 휴가를 오신다고 한다. 매년 이곳에 머물다보니 자연스럽게 캠핑마을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고 계셨다.
비가 내렸던 오후, 냉장고에 경고등이 켜지며 작동이 되지 않았다. 비가 잦아들지마자 남편은 확인을 해보겠다며 어두워진 시간인데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내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마티, 냉장고 고장났어?" 하는 라울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어떻게 아셨지?
그렇게 우리집으로 건너 오신 라울 아저씨는 남편과 함께 몇시간에 걸쳐 냉장고를 고쳐냈다. 그 후로도 고장나서 못쓰고 있던 발전기, 오는 길에 돌부리에 부딪쳐서 고장났던 출입구 계단, 라울이 먼저 찾아와 고치자고 선동하면 남편도 신이나서 연장통을 열었고, 그러다보면 주변 이웃들이 총출동해서 함께 고치고, 다함께 박수로 마무리하는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라울 아저씨는 남편이 아들처럼 여겨지는지, 틈만 나면 마티~하고 부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젊은 시절부터 캠핑을 좋아해서 네명의 딸들을 줄줄이 데리고 여행을 다녔던 라울아저씨 부부는 수많은 종류의 캠핑카를 다 거쳐봤다고 한다. 지금은 딸들이 성장해 두분이 여행을 하니 딸들이 차지했던 두개의 이층 침대는 심심하게 비어있다. 캠핑버스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작은 플라스틱 컵이나 장난감 블럭같은 것들이 손주들이 가끔 놀러온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저것 신경써주시고 챙겨주시는 아저씨 마음이 고마워서 두분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라울 아저씨가 우리 캠핑버스 문을 열었을때, 아이처럼 웃고 계신 아저씨의 얼굴보다 손에 들고 계신 아코디언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꼼꼼한 라울 아저씨의 성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는듯 반질반질 잘 닦여진 악기에서 멋과 흥을 아는 사람의 아우라가 풍긴다. 저녁 식사를 시작하기전 함께 즉흥 연주를 하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마치 부자지간 같아 파스타 소스를 만드는 내 얼굴도 흐뭇하게 달궈졌다.
네명의 딸들을 총출동해서 캠핑버스에 태우고 여행을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딸들의 어린시절 함께한 여행의 행복함으로 아버지의 얼굴은 주름마저 다정하다. 운전을 좋아하는 아저씨가 여덟시간, 아홉시간 쉬지 않고 달리면 제니 아줌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운전하는 손에 쥐어준다. 새벽에 출발한 탓에 네 딸들은 달리는 와중에도 곤하게 잠을 잤을 것이다.
부부의 딸중에 세명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그 중 한 아이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와인을 반병쯤 비운 뒤에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서른살까지 먹고, 입고, 배변을 해결하는 모든 일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해야 했던 셋째딸. 중증장애가 있던 딸까지 모두 데리고 그 많은 여행을 했던 라울 아저씨 부부. 자식들을 다 키우고 유유자적하게 노후를 즐기는 두 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평생 인내하고 희생했던 삶의 깊이가 절절하게 와닿는다.
새로운 곳에 가서 풍경을 보는 것과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화해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온몸의 뒤틀림과 표정으로 표현해 냈던 셋째딸. 삼십년이라는 짧은 삶을 산 그 셋째딸을 일년 전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두 사람만의 휴가를 보내고 계신 것이었다.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과 보살피는 마음이 항상 넘치는 두분의 옆에 우연히 자리를 잡은 우리에게까지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 온 것일테다.
오늘 아침은 우리 가족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며칠간 머물렀으니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라울아저씨 부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지만 아저씨는 근처 도시로 운전면허를 연장하러 가신 상태였다. 아저씨께 편지를 쓰는걸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본다. 큰 아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라울 아저씨의 캠핑버스를 그려 선물로 드리겠다며 진지하게 연필을 사각거렸다.
며칠동안 이웃이 되어 아버지처럼 우리를 돌봐준 라울아저씨.
헤어짐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아저씨가 돌아오시면 보여주겠다며 제니아줌마는 우리가 가는 내내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으셨다.
나는 그 모습이 작아져 사라질때까지 고개를 꺾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