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알래스카까지 갈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는 리듬이 중요하다.
대략 몇시쯤 일어나서 대략 뭘 먹고 대략 어떤 활동을 하고나면 쉬고 또 다른 활동이 이어진다. 그 대략이라는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루의 일과를 이루고, 그 반복되는 일과들을 통해서 아이들은 안정감을 느낀다.
변화나 새로운 것들에 민첩하게 반응해서 적응하는 아이들이 있는가하면, 일정을 미리 예측하고 갈 수 있도록 부모가 세심하게 주지해주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큰 아이는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변화를 즐기는 아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어딜가도 친구들을 만들어 논다. 한번은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어느샌가 근처에서 고기를 잡던 낚시꾼 옆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아저씨 포스로 오늘 고기 많이 잡았수?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더랬다.
그런 아이의 기질 덕분에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도 아이에 대한 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더 많은 것을 배우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오늘 큰 위기가 찾아왔다.
작은 공간에서 네 식구가 부대끼는 것은 어른인 우리에게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화장실은 이렇게 써야하고, 문은 이렇게 닫아야 하고, 캠핑버스 안에는 아이들이 만지작거리지 말아야할 것들도 종종 있다. 그렇다보니 남편과 나는 아이들에게 그거 만지지마라, 흘리지마라, 빼지마라, 가만히 좀 있어라, 하루종일 금지하는 명령만 반복해댔다.
아이는 그 와중에
엄마 강물에서 수영할래?
자전거 타고 한바퀴 돌래?
이거 카드놀이 같이할래?
하루종일 즐겁기 위한 제안을 하는데 지금은 이래서 안돼, 조금만 기다려, 이것만 정리하고 하자, 도망치는 대답만 하다가 둘째가 낮잠에서 깨어나면 둘째를 먹이고 얼르고 달래느라 자연스럽게 큰 아이의 제안은 무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번씩 혼을 냈다.
겨우 걸음마를 하는 동생을 넘어뜨린다거나 본의 아니게 문을 쾅 닫는 다거나 자전거를 탈때 헬멧을 쓰지 않는다거나 그리 심각한 문제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곤 했다. 부모인 우리 역시 이 모든 변화와 일거리들에 지치고 더위에 시달리다보니 아이들에게(혹은 약자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이른바 ‘감정의 하수구’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큰 아이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좀처럼 드러눕는 일이 없는 아이가 얼굴 색이 어두워져 등을 대고 있을 때는 가볍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우울증에 걸린듯 기운없이 책을 들고 있던 아이는 결국 아빠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아빠, 집에 가고 싶어
지금, 이제, 하루, 아니 이틀, 지났, 는데, 이제, 여행,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우리, 알래, 스카, 까지, 아마도, 가야할거같은데, 뭐?
집에 가자고?
비상이다.
우울한 아이를 족쳐서 알래스카까지 데려갈수는 없지 않은가. 남편은 급히 돗자리를 꺼내 푸르고 한가한 잔디밭으로 큰아이를 데려갔다.
음식이 안맞았는지, 더위때문인지 얼굴과 온몸에 벌겋게 발진이 올라온 둘째가 지금 문제가 아니다.
아빠와 한참 얘기를 하더니 침대에 드러눕는 아이. 너를 지나치게 큰사람 취급을 했구나. 일곱살, 아직 부드러운 배려와 어리광을 받아주는 엄마가 필요한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구나, 엄마가 힘든 것까지 너에게 받아내라고 했구나.
어제까지 뭔 짓을 해도 거슬리기만 했던 아이가 환하게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만하면 어른스럽고, 이만하면 동생을 잘 봐주고, 이만하면 유쾌하고, 이만하면 대단한 그 아이의 작은 등이 큰 나무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침대로 같이 뛰어 올라갔다. 나긋나긋한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낼때는 무조건 한국말을 하지만)
우리 앞에 아주 긴 여정이 있는데 다같이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엄마 아빠가 고쳐야 할 점이 많은 것 같아. 새안이가 원하는거 있으면 뭐든 얘기해봐.
경상도 사투리로는 부드러운 엄마 코스프레(!)를 절대 할수가 없다. 시적인 표현을 해야할때는 아무래도 외국어가 덜 낯간지럽기 마련이다.
아이의 대답.
큰 상자에 사탕이 가득 있었으면 좋겠어.
흡.
뭔가 철학적인 주문을 할거라고 기대한 엄마가 잘못이다. 그래 넌 아직 일곱살 어린이지.
그래, 몸에 덜 해로운 사탕을 엄마가 한번 찾아볼께.
그리고 니가 동생을 발로 밀어서 넘어뜨리면 동생 걱정은 하나도 안하고 발 괜찮아? 애기가 뭐가 중요해 지 머리가 무거워서 넘어진거지, 애기 넘어뜨리느라고 발 안다쳤어? 화 안내고 엄마가 이렇게 물어볼께.
그러자 아들은 가느다란 눈을 더 길게 흩트리며 깔깔 웃는다. 아직 빠지지 않은 작은 앞니를 쪼르르 드러내며 낄낄 웃는다. 젖니도 다 빠지지 않은 아이, 덩치만 산만했지 아직 어린 아이.
아이를 어른처럼 존중하면서도 아이다움을 지켜주는건 참 어렵다.
그래도 이렇게 피식 웃으면 다시 길을 떠날 힘이 생긴다.
그나저나 우리 가족, 알래스카까지 과연 갈 수 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