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세상 싫은 시간

by F와 T 공생하기
가난한 사람들은 제각각 가난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마치 레오 톨스토이의 ‘안나 카라레나’의 첫 소절과도 같이.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인생에 있어 부와 가난만큼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없으리라.

하지만 부와 가난이 온전히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운이 칠 할, 기가 삼 할!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치자.


보기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30%밖에 안된다는 것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태생, 한국, 강원도 산골, 부모, 가난, 환경 등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니다.

이들이 70%라 해도 자신의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30%는 의외로 강하고,

무엇보다 우리네 인생은 길다.

*한 해 성장률을 10%로 하면, 10년이면 2.6배, 30년이면 17.4배로 최초 자신이 보유한 자산, 능력이 대략 20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을 갖고 세상만사를 대한 다고 하더라도 모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


신기하게도 나의 가족들 대부분은 지독히도 가난했던 듯하다.


아버지 가계, 어머니 가계 모두 예외 없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니 뭐 이런 집구석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1910년대 경상북도 영주 사람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낙후된 농업지역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이니 그 옛날에는 오죽했으랴.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름은 당대와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물어볼 사람이 없다.

60년대 초 출생 사촌형은 오래전 1년에 한 번 선산에 모여 벌초를 할라치면 족보의 진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지지리 궁상 아무 의미 없다.‘ 생각했었다.


아버지를 기준으로 가족관계를 찾아보면,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나와있다.

상당 부분 세월의 흔적에 따라 일본어, 한자로 적혀있어 해독이 쉽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몇 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몇 명의 아이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었는지 정도는 눈대중으로도 알아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놀랍게도 아버지의 어머니 흔적이 보였다. 아버지 10살 즈음에 유명을 달리하신 듯하다.


‘가엾은 나의 아버지.’

나는 70년대 말 아버지의 아버지를 취학 전에 한 번 보고는 한 20년쯤 지나 춘천 큰 집에서 치러진 장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서류상이 아닌 내가 아는 실존 인물들이 내비친 아버지의 아버지는 이랬다.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어머니가 아내를 나무라면 그 역시 매로서 아내를 엄히 다스렸고,

심한 매질로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학교를 다녀온 손주(나의 사촌형, 장손)가 특식(가끔 빵을 학교에서 나눠줬던 모양이다)을 남겨오지 않으면

이 역시 욕설과 함께 매질로 응징했고,

태어나 처음 본 내게도 담배 심부름을 시킨 것 말고는 가족이 아닌 이웃으로도 아무런 온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내가 처음 본 그때는 새로운 살림을 차리기 위해 필요한 돈을 아들에게 뜯어내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운 걸음을 한 것이었다.

1970년대 가축 축사 옆에 아버지, 형(나는 대여섯 살 사실상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움이 안 되기는 형도 마찬가지였지 않았을까? 나보다 4살 많으니.)이 지은 비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집에 말이다.

이런 아버지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치르는 명절 제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온당치 않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명절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늘 살얼음판이었고, 불행한 날이었다.


행불행은 지금의 내가 만들어 낸 것이지 당시 나의 인식의 범위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추석? 설?


단지 교과서에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강제로 연결시켜야만 했던 추상적인 개념들 사이의 관계였다.


’ 사랑‘ 역시 내게는 여전히 종이에 적힌 추상적인 개념 수준의 단어다.

차라리 3류 에로영화의 애무 정도로 인지했을 가능성이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높을 것이다.


그때의 명절 풍경이라면,


평소에도 글씨를 정성스레 써야만 했지만 차례를 위한 지방을 쓸라치면 이른 아침부터 긴장 속에 써 내려가야만 했다.

다행히도 둘째인 내게는 평생 이 긴장의 기회는 다행히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익숙한 듯 수없이 많은 제수음식을 빠짐없이 해냈다.

하지만 늘 아버지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가끔 하나씩 빠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북어포, 이번에는 조기, 이번에는 …

사실 어떤 이유로든 아버지는 불쾌함을 증가시켰고,

온 집안을 불안과 공포 속에 사로잡았다.

다행히 차례를 마친다면,

침묵 속에 재빨리 식사를 마쳐야 했고,

아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전화 속에 백부께 짜증 가득 담아 안부를 전했다.

심지어 아버지의 아버지에게도 안부를 전하지는 않았고, 명절에 단 한 번도 일가친척이 오간 적이 없다.

내게 명절이란 명절특집 명화시간이 있다는 정도 이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스스로도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심지어 자식을 위해서라면 조상들에게 소원하고, 소원하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고, …

하지만 아버지는 가난했고, 아버지의 어머니는 일찍 세상과 이별하셨고,

일찍이 돈을 벌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야 했다.

생존 외의 가치는 없었으리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셨으리라.

모르는 것이 창피해서

화를 내셨으리라.

화가 화를 부르고

술을 부르고

악마의 폭력을 휘두르고 …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과 함께 상당한 현금을 얻었다.

그러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복을 견뎌내지 못하고 탕진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누나의 통장까지 거덜을 내었다.



누나는 독립을 선택했으나 오래지 않아 나이 40에 암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누나는 내게 ‘가족들에게 사랑을 보여줘’라며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나 역시 행복과 사랑은 종이 속의, 영화 속의 추상적 개념일 뿐.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심지어 내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고, 하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가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형과 어머니를 설득해

아버지를 알코올중독 치료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다.

권력공백 상태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형은 단호하게 명절 제사를 없애는 대신 근거리 여행으로 대체하였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치료 후에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사회성은 없었다.

세상을 증오와 복수의 대상으로 여기며

맹호의 눈빛으로 가족과 모두를 바라보았다.


내 아버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을 겪어야 했고

이 슬픔을 느끼고, 극복하기도 전에

가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내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족의 사랑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여주지를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돈을 벌어

탕진하고,

다시

술과 폭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따랐다.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이

고팠으면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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