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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빈둥빈둥

by F와 T 공생하기

'휴가를 휴가답게 ‘를 외치며, 뭔가 하나쯤 쓸모 있는 것을 이루고,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 보리라 생각했다.


심지어는 논문도 여러 편, 인공지능도 쓸만한 것 하나쯤, 호주에서의 산업정책도 눈 안에 두고 이후 기술협력을 위한 파트너도 찾아보겠노라 마음속에 간직했었다.


물론 여전히 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심각하다.


난 평생 내 마음을 몰랐고,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다.

늘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마치 가보지 않은 길을 지날 때의 불안함과도 같이 앞으로 다가올 날이 편하지 않다.


직장을 옮긴 이후에도 줄곧 10년 이상을 이리 살았다.


어느 날 선임 선배님께서 부르시더니 내게 모두가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일을 부탁하셨다.


창피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공공연구기관에서는 자기 연구만 잘하면 되지 내 연구와 네 연구 사이의 말이 되도록 연결하는 것은 힘든 일로서 모두가 꺼린다.

기술과 기술 사이의 연관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해야 하며, 새로운 기획, 인사관리 등 통상의 과학기술 연구자들이 가장 꺼리는 일을 주로 해야 하는 관리직은 아예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관리직이 시작되면 사실상 연구원으로서 수명은 끝이다라는 생각들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사례를 찾기 어려운 예외도 있기는 하다. 보통의 경우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낼 수 있도록 동료들을 독려하고 성과를 이뤄내는 고귀한 일이지만 현실은 찬밥신세다.


힘든 일을 부탁하시니 우선 나를 선택해 준 것에 감사하게 생각했고, 인사를 드렸다. 또한 필연적으로 '왜 나이어야 하느냐?'를 여쭤봤다.


'너는 다양한 경험을 했고, 이 일을 잘하고, 좋아하지 않느냐?'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난 좋아하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좋아서 한 일이 아닙니다.'


선배님 역시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말씀하셨다.

'그럼, 왜 했어?'


'필요하다 판단했고,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는 생각에 했고,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머릿속에 그간 참아왔던 세월이 내 귀 한쪽에다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일단 당장 일어나.'


선배님이 아니라 선배님이 부탁하고자 하는 일은

이제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내가 좋아하지도 사실은 잘하지도 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내 아내와 자식들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한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렵지 않게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다.

단지 의무와 같은 수준의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있고,

경험상 혼자 동굴에 갇히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정도만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한다.

마치 아틀라스와 같이 감히 오르지 못할 신에게 도전하다 평생 하늘과 지구를 등에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형벌을 받은 아틀라스 마냥.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경치를 구경하고,

빈둥빈둥.


가끔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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