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야 Sep 13. 2023

할머니는 엄마한테 왜 그랬어?

피의 대물림

엄마.


세상에 저 단어만큼이나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포한 단어가 또 있을까. 저 두 글자는 단 몇 초만에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위력을 지녔다. 나 또한 그렇다. 아니, 그랬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었다.




우리나라는 유독 모성애에 인식이 후한 나라인 것 같다. 너무 성스러워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이에 반하는 종자는 순식간에 패륜아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패륜아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전직 패륜아 타이틀을 달았던 나는 문득 정확한 의미가 궁금해져서 사전에 검색을 해보았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그러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


아하. 그렇다면 도리가 뭔지 또 찾아보아야 한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


"엄마 혼자서 너희를 얼마나 힘겹게 키우는지 알제? 우리 제야는 엄마 말도 잘 듣고 참 착하다 착해."


외할머니는 나만 보면 그렇게 착하다고 했다. 말이 착하다였지 실상은 착해져라는 주문을 외운 셈이다. 그러니까 외가 쪽 기준으로 나는 바른길을 행하여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는 손녀이자 조카이자 딸이었다. 적어도 중학교 일 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그 후로 가출에 이르기까지 단 2년이라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 이학년 때였나. 반 친구들 사이에서 크레이지 아케이드라는 게임이 열풍이었다. 우리 집 컴퓨터는 숙제를 할 때나 킬 수 있는 신성한 물건이라 게임한다고 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랬다간 반역자 취급이 따로 없었다. 그런들 어떡하나. 게임을 빙자한 제2차 친목이 이뤄지는 곳인데. 반역죄로 단두대에 올라서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밤 12시.


엄마가 잠들었다. 살금살금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어찌나 심장이 요동치던지. 순간 이게 이렇게까지 떨릴 일인가 현타 아닌 현타가 왔지만 애써 생각을 떨쳐내고 이내 방문을 열었다.


달칵.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후 낡고 오래된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였다. 이 전자 세계에서는 학교에서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아이들의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임은 부가서비스일 뿐 채팅창에 끊이지 않는 'ㅋ' 행진에 나도 모르게 모니터 속으로 푹 빠져들던 찰나였다.


쾅!


아뿔싸. 낄낄거리느라 방심해 버린 걸까. 등 뒤로 살기 아닌 살기가 느껴진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을 헐레벌떡 주워 들곤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냥 지금처럼 잔소리나 몇 번 듣고 말았다면 엄마와 나는 지금보다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뭐라 뭐라 이야기가 오고 갔다. 잔잔했던 데시벨이 점점 커지더니 고성으로 번진다. 그러다 마침내 아래와 같은 대목에 도달한다.


"누가 더러운 씨족 아니랄까 봐."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지 못하고 들고 있던 심장이 손바닥 위에서 부스스, 산산조각 나더니 이내 공중으로 흩뿌려진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사춘기여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엄마 말에 큰 의미를 두는구나. 그런데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춘기 탓도 있었겠지만 내 성향도 한몫한 것 같다. 이렇게 십여 년이 지나도 당시의 상황들이 또렷이 기억나는 이유가 말이다.


남들 눈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저게 대수야? 할 수 있겠다. 이해한다. 누구나 상처받는 기준은 제각각인 법이니까. 그냥 나는 그랬다. 난 저런 일들이 참 상처였다. 대수냐는 반응에 미처 반박하지 못하고 그렇죠, 대수겠어요. 웃고 말까 봐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 꺼내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묻어버린 것도 모자라 두 발로 꽝꽝 찍어 눌러서 상처들이 불쑥 고개를 못 쳐들도록 아주 암매장을 시켜놨건만 엉뚱하게도 이곳에 일종의 썰(?)을 풀고 앉아 있다. 이 나이 먹고 내가 왜 이러나. 알 것도 같다. 이게 다 엄마한테 고작 이 한 마디를 못해서이다.


"엄마. 나한테 왜 그랬어?"




왜 그랬긴. 수입은 쥐꼬리만 하지 공부 잘하는 첫째 딸 어떻게든 성공시키고는 싶지. 혼자서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까지 키우느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제아야. 엄마는 너를 어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너는 고작해야 열다섯, 열여섯. 어린애일 뿐인데 너를 어른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대했다. 그래서 내 생각만치 못 따라오면 화를 내고... 너를 어린애로 보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왜 그랬냐고 따지지는 못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들었던 말이다. 눈물이 고였다. 왜인지도 이유도 모를 눈물이었다. 오늘은 한번 속 시원하게 왜 그랬냐 외쳐보려고 마음먹었는데. 갑작스러운 사과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제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한동안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주전자처럼 살았더니 스스로 지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무엇보다 먹고살기 바빠진 이후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울증은 풍족해서 오는 병이라는 말을 참 싫어하는데 언뜻 무슨 의미로 쓰이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안 됐다는 전제 하에 풍족해지는 순간 우울증이 다시 도질 수도 있을 텐데 평생을 그지처럼 쫓기며 살아야 우울증이 안 오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던 와중 어느 날 이종 사촌동생이 말해줄 게 있다며 소식을 전해왔다. 동생의 말을 듣고 한동안 뒤통수가 얼얼한 채로 지냈는데 그 소식은 이러하다.


우리 자매 모두 절연을 선언했을 때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찾아갔단다. 외할머니를 찾아갔단다. 그러고선 이게 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키웠기 때문이라고 악을 썼다는 소식이었다. 일단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존경(?)스럽다였다. 와, 난 저렇게 속 시원하게 못 내질렀는데 엄마 대단하네. 두 번째로는 내가 엄마한테 느끼는 이 감정이 어쩌면 우리 모녀 관계만이 아니라 보다 확장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겠구나. 올라가다 보면 끝도 없이 오를 수 있겠구나. 역사는 한순간에 쓰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그러니까 엄마한테 옛날에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기 전에 외할머니를 찾아가야 했었다. 그러고선 아래와 같은 희대의 패륜적인 발언을 해야만 엄마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엄마를 왜 저렇게 키웠어?"




할머니가 엄마를 키운 방식에는 분명한 문제점이 있다. 이는 나중으로 미루자. 요점은 이거다. 환경이 이렇게 무섭다는 거다. 엄마가 우리 자매에게 한 패악(패륜아 소리 지겹도록 들었다. 나도 이렇게라도 한 번만 말해보자)을 파헤쳐보면 엄마의 유년시절이 묻혀있다.


어디 엄마뿐이리라. 할머니의 행동을 파헤쳐보면 할머니의 유년시절이, 증조할머니의 행동을 파헤쳐보면... 이 행렬의 끝을 보려면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을 줄줄이 소환해야 한다. 적어도 현존하는 조상들만 논하자면 어쨌거나 엄마는 외할머니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했고 이에 큰 답답함도 느끼지 않은 모양이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 이랬던가. 그렇게 커와서 우리도 그렇게 키웠을 뿐인데. 웬 반골기질 하나가 튀어나왔네?


당황스러웠을 거다.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할머니에게 왜 나를 이렇게 키웠냐고 원망해서는 안 됐다.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제는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을 부모 탓으로 돌리기엔 어느덧 엄마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섰다. 엄마는 할머니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보았어야 했다. 남편이 집을 나가고 첫째 딸이 가출하고 막내마저 가출을 했을 때에는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을 해보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외할머니를 찾아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 남편은 그렇다 치고 자식은 좀 달라야 하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 때에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설움과 원망을 쌓아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 올린 거대한 원망이라는 화살이 마침내 할머니를 향해 날아든 그 순간을 사촌동생에게 전해 들었을 때에는 겉으론 웃고 말았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오늘도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대답한다. 이 모계 대대로 이어온 악습 아닌 악습을 끊기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이대로라면 나 또한 내 자식에게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게다가 아빠를 쏙 빼닮은 내 외양과는 달리 내면으로는 엄마를 많이 닮아있다. 엄마는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진득한 엄마의 유전자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이야 이 유전자가 밖으로 발현되지 않았지만 또 모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땅에 묻어뒀던 내 유년시절의 상처들이 기어코 고개를 불쑥 쳐들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봉인 해제된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고 이렇게 피의 대물림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한테 어릴 적에 왜 그랬냐고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나도 어느덧 서른이 되어간다. 아직 젊다면 젊지만 적어도 부모 탓을 할 나이는 못 된다. 하려면 진작에 십 년 전 즈음에 했어야 했다. 이미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자신한테 왜 그랬냐 물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볼까 한다. 내 대에서 끊어내는 일, 그 일을 해볼까 싶다.


현재 나의 지상 최대의 과제는 결혼이 아닌 악습 단절이다.

이전 02화 엄마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