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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Sep 10. 2023

엄마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요

네가?

"언제 결혼할 생각이니?" 


내 나이 스물아홉. 십 대 때는 공부가 하늘 아래 가장 큰 사명이었다면 이제는 결혼이다. 명절 잔소리가 남 얘기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나도 저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엄마의 질문보다 내 나이가 벌써 결혼을 논할 나이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한 헛웃음이 나온다. 평생 20대 초반일줄 알았는데. 이러다 또 금방 마흔이 되겠지. 


"나는 결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서."


"왜?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데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


여기서 잠깐 우리 엄마에 대해 말하자면 보수도 이런 보수가 없다는 표현을 갖다 붙일 수 있는 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에는 시기마다 밟아야 하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으로 그 단계를 거의 부수다시피 무시하는 나 같은 딸을 만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십 대 후반에 가출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자퇴, 대학교 자퇴, 직장생활 거의 해본 적 없음. 아직까지 그렇다 할 뚜렷한 직업 없는 되려 빚만 남은 개인사업자. 그러니까 안정과는 동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 이 나이 먹고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딸의 마지막 인생역전은 오로지 결혼뿐이라고 믿고 계시는 듯하다. 


대단한 남자 만나서 팔자 펴라는 소리가 아니다. 예전과는 달리 욕심을 많이 비우셨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저 성실하고 날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 더는 홀로 고군분투하지 말고 둘이서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거다. 그래, 이것도 인생역전이라면 역전이겠지. 


그런데 이 역전 신화에는 엄마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착오가 하나 있다. 가출, 자퇴, 사업자. 이 단어 세 가지가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무엇이겠는가. [가출, 자퇴, 사업자, 결혼]과 [가출, 자퇴, 사업자, 독신]. 


엄마. 딱 봐도 후자가 배열이 자연스럽잖아. 이 사실을 엄마만 모른다?




"너는 그 나이 먹고도 부모 마음을 그렇게 모르나?"


퇴근 후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난데없는 화살이 날아든다. 원망 섞인 화살은 내 가슴 깊숙이 파고 들어와 목구멍으로 겨우 떠넘긴 밥 한 술이 더는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호흡을 크게 내뱉어 본다.


"후."


내려갈 리가 없지. 젠장, 잘하면 체하겠는데?


"엄마도 내 마음을 모르긴 마찬가지잖아."


아니야. 그냥 알겠다고 해. 괜히 맞받아치면 대화만 길어진다고. 


정적이 흐른다. 이 순간이야말로 엄마와의 통화에서 가장 고역인 순간이다. 말이 없다. 맴도는 침묵 속에서 둘 다 애꿎은 전화기만 붙들고 있자면 시간이 멈춘 마냥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얼음 땡 놀이에서 땡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엄마!"


참다못한 내가 먼저 땡을 외쳤다. 그제야 '어어'라는 대답을 시작으로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엄마의 요지는 이렇다. 인생에 있어 결혼은 당연한 수순이란다. 혼자 버는 것보단 둘이 버는 게 낫단다. 저 대목은 마치 엄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끝으로 내가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란다는 말을 건넸다. 하고 싶은 말은 꾹꾹 눌러 담으며 열심히 '응응'이라고 회답한 결과 이십 여분만에 겨우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치이익.


속에 천불이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탄산캔 하나를 땄다.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벌컥벌컥 잘도 들이마셨다. 안정, 안정이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자기 객관화는 몇 없는 내 특기 중 하나이다. 내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다. 여기서 준비란 경제적인 측면과 함께 마음가짐도 포함이다. 잘은 모르면서도 결혼에는 희생과 양보가 따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희생하고 양보할 위인이 못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일단 식을 올리기만 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흘러간다고 여기는 것 같다. 엄마 나름의 자식 결혼시킬 준비를 해두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아파트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머리를 싸매며 고민을 하다 보면 엄마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어 진다. 엄마는 결혼 생활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 것 같냐고. 턱 끝까지 할 말이 차오르다가도 관두는 이유는 굳이 부모님의 과거사를 논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너네 아빠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답만 돌아올 게 뻔해서이다. 결혼 생활이 뭐냐라고 물으면 둘이서 성실히 벌고 열심히 자식 키우는 것이란 상투적인 대답밖에 안 돌아올 것이란 이유도 있다.


나는 모르겠다. 안정 안정 노래를 부르는 엄마와 내가 다를 바가 있겠는가. 나라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을까. 살다 보니 이렇게 아슬아슬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위태로움이 결혼이라는 사건 하나로 한방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 하나도 똑바로 세울 힘이 없는데 두 명의 삶을 내 바운더리 안에 넣을 자신이 없다.


더욱 답답한 점은 이렇게 회의적이면서도 한편으론 혼자서 늙어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 차라리 두려움이 없다면 밀어붙여라도 보겠건만. 스스로의 하찮음에 자조 섞인 너털웃음이 양 입꼬리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이쯤 되면 늘 도달하는 결론이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되새긴다. 


엄마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흔들리니까 엄마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엄마한테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고 잔소리하지 마란 말을 할 필요도 없지. 이미 그 잔소리에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내가 나이를 튼튼하게 먹지 못했다는 반증일 테니까. 


아, 모르겠다. 인생 뭐 별 거 있어. 저녁이나 마저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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