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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Sep 06. 2023

서른, 잔치는 끝났다.

곧이어 폐막식이 있겠습니다.

내 이름은 이제야.


가명이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자 곧이어 어떤 이름을 빌려와야 막힘없이 써내려갈 수 있을지 깊은 고민이 뒤따랐다. 미사어구를 붙이기엔 애매한 스물아홉이라는 세월을 한 단어로 함축시킬, 그런 이름 어디 없을까?


"땡땡아. 니 올해 몇 살이고."


하하 호호 웃음꽃이 핀 어느 추석 연휴날이었다. 외할머니께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틈을 가로질러 날카롭게 쏘아 올린 화살이 탁! 멀뚱히 앉아있던 나에게 훌륭하게 명중했다. 얼떨결에 얻어터진 과녁이 된 나는 '저요? 올해 스물아홉 내년에 서른이요'라고 뾰루퉁하게 대답했다. 머릿속으론 여전히 가명을 고민하며 할머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체 내뱉은 그야말로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아이고. 니 이제야 서른이가!"




이제야 서른이라니.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내가 서른이라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친척들 사이에선 '쟤 언제 결혼한대?'와 같은 징글맞은 멘트의 '쟤'가 되어있었다. 오 마이 갓. 정말 믿을 수 없어. 내가 서른이라니!


"잔치는 다 끝났다."


망연자실도 잠시 어디선가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던 나를 지상으로 확 끌어내려 두 발을 지상 위로 단단히 붙이다 못해 다시는 올려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양 발목을 콱 움켜쥐는 압박감이 몰려오는 음성이었다. 대체 누가 저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 한껏 예민해진 신경으로 망언의 근원을 찾아 헤매니 웬걸. 대낮부터 술여 절여있는 외할아버지가 눈에 띄는게 아닌가. 허, 이것 참 이상한 일이다. 올해 초 할아버지 장례를 치렀건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건가. 친애하는 우리 박씨 가족분들, 저기 할아버지께서 소파에 거의 누워있듯이 앉아계시는데 다들 안 보이세요들?


"제아야."


어느덧 입에 담배 한 대를 문 할아버지의 나즈막한 부름이 거실을 자욱히 메운 연기 사이를 비집으며 내게 닿았다. 생전 기관지가 좋지 않아 기침을 달고 사셨는데 어떻게,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이라도 한번 말려봐야 하나.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할아버지는 맹한 손녀의 대답 한번 들어보시겠다고 꽤 오랜 시간 정적을 지켰지만 끝끝내 듣지 못하고 밑의 말씀을 끝으로 당신의 담배 연기처럼 뿌옇게 흩어져 가셨다.


"잔치 끝낼 준비를 해라."




누군가 말했다. 서른이 된다는 것은 이십 대의 잔치를 끝내는 일이라고. 손님들도 붐비던 마당이 언제 그랬냐듯 인간관계가 정리되고 새로운 막에 접어들기 전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기라는 뜻이 아닐까. 어쨌거나 나도 몇 개월만 지나면 서른이다. 이십 대는 눈 감았다 뜬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더니 정말 그러했다.


이제 머지않아 곧 잔치를 끝내야 한다.


복작복작 모인 사람들 손에 무언가 하나씩 쥐여주고 배웅하며, 언제 잔치가 열렸는지도 모를 고요한 적막 속에 많은 이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홀로 묵묵히 치워나가며. 사람들로 붐볐던, 이제는 텅 빈 마당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툇마루에 앉아있자면.


아. 잔치가 끝났구나.


잠깐 허공을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가 등잔을 밝히겠지. 창호문은 꼬옥 닫아둔 채 방 안에서 나 홀로 오롯이 존재할 것이다. 하루 이틀. 해가 뜨고 달빛이 내려앉길 수없이 반복하는 나날들이다. 내 잔치에 놀러 온 이들 중 몇몇은 저들끼리 이 집주인 우리 보낼 때 좀 이상하지 않았냐고 얘길 나눴을 것이고 모두 동감한 채 발걸음을 돌려 대문을 열고 기웃기웃 들어와 조용히 툇마루에 자리 잡곤 나를 기다릴 것이다. 왜 나오지 않냐 재촉 한번 없이. 혹여나 내가 추울세라 배고플세라 조심조심 건네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따금 창호문 너머 내 잔치가 의미 있는 잔치였냐는 질문엔 그렇다고 답해 줄 것이고 그걸로도 부족하여 달빛이 내려앉을 때마다 울음을 토해내는 밤에는 아무 말없이 그저 온기를 나눠줄 것이다.


"할아버지." 점점 흐려져가는 할아버지의 잔상을 붙잡으며 입을 떼었건만 그 손녀에 그 조상이라고 할아버지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옅은 담배 냄새만 남아있을뿐이었다.


"저는 아직도 십 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잔치를 잘 끝낼 수 있을까요?"




이 글은 삼십을 코 앞에 두었지만 여전히 어린 마음으로 남아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도 하지 못하며 살아가다 불현듯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어느 이의 뒤늦은 발악이다. 그는 머지않아 치를 폐막식을 무사히 마무리하고자 한다. 앞으로 내뱉을 독백을 통해 이제야라는 인물이 이십 대라는 잔치를 잘 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각자의 폐막식을 앞둔 세상 모든 이제야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감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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