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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oJang Jan 05. 2017

히말라야, 그곳에 가다(5)

나에게는 목적지, 누군가에게는 출발지 -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도무지 날씨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잠시 개었던 하늘은 아침부터 다시 비를 뿌려댔고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라는 듯, 한 조각의 맑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진흙탕으로 범벅된 길을 걸을 때마다 신발에 진흙이 들러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고 이끼로 뒤덮인 돌들은 내딛는 족족 발을 미끄려트렸다.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 날씨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두어 시간을 걸어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길은 경사도 완만해서 체력적인 부담은 덜했다. 너른 고원 위로 흐르는 냇물과 이름 모를 풀들, 그 위를 걷는 양 떼의 모습이 목가적인 풍경을 자아내면서 이 곳은 정말 신이 사는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 마차푸차레는 네팔인들에게 성스러운 곳으로 입산이 절대 금지되어 있다. 지금까지 아무도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힌두교에서 파괴의 신, 시바신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일본인 원정대가 허가를 받지 않고 올랐다가 원정대 전원이 실종되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표지판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2시간을 걸었을까? 구름 속으로 희미한 표지판이 보였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해발고도 4,20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드디어 도착했다. 꿈꿔오던 그곳에 도착했다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고,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탓과 궃은 날씨에 고갈된 체력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박영석 대장, 신동민 대원, 강기석 대원 추모비

여전히 날씨는 비가 오고 바람이 제법 불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사람 중 몇몇은 고산병 증세와 날씨 때문에 서둘러 내려갔다. 네팔 사람 중 한 명이 캠프 뒤편 언덕에 박영석 대장님 추모비가 있다고 알려줘서 바위틈에 난 길을 따라 언덕 위로 걸어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추모비가 있었다. 산처럼 살다가 산으로 돌아간 이들을 기리는 추모글들이 남겨져 있었고, 주변에는 추모비와 함께 이름 모를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돌탑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박영석 대장님, 그분의 이름과 업적에 대해 조금 알고는 있었지만 그분이 보여준 열정과 걸어온 업적은 잘 몰랐다. 하지만 이곳에 다다르고서야 알게 된 그분의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은 우리가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었고 추모비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동안 추모비 근처에 머물며 산이 되신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혹시 안나푸르나에 어딘가에 머물고 계시다면 나에게 잠시라도 그 모습을 보게 해 주셨으면 하는 부탁도 함께...


베이스 캠프로 올라오는 그 길 저 너머에 마차푸차레가 있다고 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사람 중에 일정 상 오늘 하산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로 하나 둘 짐을 싸서 떠났다. 이번 여행에서 산을 볼 수 없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숙소를 이곳으로 잡았던 터라 테라스에 나와 앉아 그동안의 여정을 노트에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려고 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구름 사이로 햇무리가 보이고 빗방울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어렴풋이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 사이로 산봉우리의 윤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은 모습을 드러내는 안나푸르나에 집중되었고 그 어떠한 말도 필요가 없었고,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순간순간 히말라야가 만들어내는 기적이었다.

산봉우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것은 안나푸르나 남봉이었다.
동쪽으로는 마차푸차레의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안나푸르나 남봉 옆으로 안나푸르나 1봉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만년설이 쌓인 안나푸르나 남봉의 자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났다
해발 7,219미터의 안나푸르나 남봉
해발 8,091미터의 안나푸르나 1봉
해발 6,997미터의 마차푸차레 - 네팔 사람들이 왜 성스러운 산으로 여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그 모습이 담기지 않았다. 아니 담을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사진에 담는 것을 포기하고 행여라도 놓칠까 눈으로 담기만 했다.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눈으로 담으면 나중에 이 순간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스케치라도 남겼을 것인데... 사진이라도 잘 찍으면 빛의 흔적으로라도 남길 텐데... 글이라도 잘 끼적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도 그러지 못함에 아쉬움이 너무 컸다.

신이 정말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이 정말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아마 이 곳을 가장 먼저 만들었을 것 같았다.
베이스캠프로 올라오는 길 너머로 보이는 보이는 마차푸차레 - 오전내내 이 곳은 구름으로 가득했었다.

그렇게 1시간 여를 보여준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는 산 아래에서 올라온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였지만 허락해준 히말라야에 감사했다. 산행을 시작하고 항상 비가 내리고 구름이 낀 날이 계속되어서 어느 정도 포기했었는데 산이 허락했다. 이곳에 온 것은 내 뜻이지만 산을 보여주는 것은 산의 뜻이다. 산 중에는 칠흙같은 밤이 찾아왔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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