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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Dec 23. 2021

커피 콜?

안녕. 후배. 또 만나.

내가 줄 글을 길게 쓸 수 있는 저력은 말에 있다. 말이 많고, 그 많은 말을 다 하지 못하면 병이 나는 몹쓸 성정이라 어디에 건 글이라도 쓴다. 그게 '글'을 이어가는 힘이다. 그렇다고 오프라인에서 말을 부족하게 하느냐면 그렇지 않다. 말을 충분히 많이 한다. 아침에 제일 먼저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막내와, 8년을 함께 일한 팀 동료와, 아직은 낯선 신입 직원... 지위고하 막론하여 후배들과 주로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그 시간이 참 좋다. 그렇게 수다떨고 웃고 하는 그 시간이 주는 행복이란!


유연근무제 도입으로 9-6 출근에서 8:30-5:30 출근으로 바뀐 요즘, 아침 티타임은 회사 막내인 K와 함께하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아침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3명 중 한 명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내가 문을 열거나, 옆팀 팀장님이 계시거나, 아니면 막내 K. 나는 8시 30분이 정시 출근이지만 나머지 둘은 원래 출근시간보다 일찍 출근하는 것. K는 회사에 아르바이트가 필요한 타이밍에 자주 나타났던 친구였다. 아이 낳고 돌아와 보니 계약직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요란하지 않게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우리 회사는 기본적으로 요란스러운 사람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소처럼 묵묵하게, 그렇게 일하는 사람을 주로 뽑는달까? 물론 나처럼 목소리 크고 시끄러운 사람도 있지만, 나 또한 일하는 태도가 그렇게 거하지 않다.


회사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출근 시간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 조금씩 보이게 마련이다. 칼같이 정시에 딱 맞게 출근하는 사람, 꼭 애매하게 5~10분 늦는 사람, 최소 10분 전에 출근하는 사람, 그리고 아예 한 30분 정도 여유 있게 일찍 오는 사람. 과도한 야근은 업무 스케줄을 조정하지 못한 이유인 경우도 있지만, 아침에 정식 출근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오는 일상을 사는 사람이 일에 불성실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나의 추정이었다. 사회생활 내내 늘 30분 이상 일찍 출근해왔다는 옆팀 팀장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예뻤다.

커피 마실래요?


난 팀도 달랐고, 나와 업무로 연결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일찍 나와 하루를 준비하는 그 모습을 보며 반성도 많이 했고. 아침 출근길에 커피를 들고 오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고, 마음이 그렇게 갔다. 커피라도 사줘야겠다. 10살도 훌쩍 넘게 차이나는 선배가 뭐 그리 반갑겠냐마는 거절치 않고 따라나서 주었다. 두런두런 수다도 떨며(그래 봤자 내가 한 말이 훨씬 더 많았겠지) 20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배려의 전부였다.


연말이 되었고, 결산의 시기가 왔다. 팀마다 재계약 이슈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중 K가 유일하게 올해까지로 계약을 종료하고 퇴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적지 않게 놀랐다. 그간 아르바이트하면서 회사에 적을 둔 흔적이 있어서 재계약을 하더라도 내년 5월까지가 연장의 최대치라 했다. 그리고는 정규직 계약을 해야 하는데 회사는 그런 그에게 재계약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재계약이든, 계약 종료든 무튼 계약과 관련한 이슈에
소소하게 상처 받을 일이 생겨
하지만 받는 사람에겐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


문화예술계를 원했지만, 전공이 달라 진입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내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근무하는 사이 꽤 많은 후배들이 오고 갔고, 그때마다 아주 작은 그러나 마음에 담아지는 상처들을 안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팀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저 정도면 성실할 것 같은데 또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나? 차마 어떤 말을 얹을 수가 없었다. 혹여라도 기대를 하게 만들어서도, 또 너무 크게 속상하게 만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그냥 떠나는 날이 정해지고 평소보다 좀 더 먹을만한 밥집에 데려가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웃겼던 결혼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하며 1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커피 콜?


그날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간 날이었다. 문자를 보냈고, 마침 뒤이어 들어오던 K는 "문자 보내는 중이었어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나 말고도 그의 마지막 출근을 챙기는 다른 동료들이 있었지만 원래 결제는 선수 치는 사람이 임자다. 내가 먼저 커피숍에 가서 그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두어 명의 동료들이 더 들어와 커피를 주문했고 커피가 만들어지는 시간 동안 잠시 웃고 떠들었다. 앞으로 아무 일이 없을 것처럼. 그냥 오늘이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날인 것처럼. 자리에는 작게 포장된 선물들이 놓여있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왜 이런 선물들은 늘 막내들이 준비하는가. 미안하고 고마웠다.


늘 그랬듯 5시 30분이 되어 퇴근을 했고, 경황없이 뛰어나가다 차 안에서 생각났다. 아. 오늘 K가 마지막 날인데 인사를 못했네. 미안하네. 못내 무거워졌다. 한번 더 등이라도 쓸어주고 오고 싶었는데. 손이라도 더 잡아주고 왔어야 했는데. 정신없이 아침을 보내고 점심이 돼서 생각났다. 아. 커피. 폰을 꺼내 스타벅스 쿠폰을 보냈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을 텐데 오늘은 좀 달랐지
그래도 커피만큼은 평소처럼!


K에서 장문의 문자가 왔다. 감사했다고. 인사를 못 드리고 와 죄송했다고. 그래도 그 아침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고. 여기서의 기억을 잘 다듬어 더성장하겠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하소연할 곳이 필요하면 그게 아니어도 언제든 연락하라고. 선배는 그런 존재라고 답했다. 많은 선배들을 겪었고, 늘 생각했다. 선배들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리라. 내가 받은 인복을 내 후배들에게 반드시 물려주리라.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대가 달랐고, 정서도 표현 방식도 다 달랐다. 조심스러웠고 또 그러면서도 가까이 가고 싶었다. 내가 받은 방식은 늘 뭔가를 얻어먹는 거였고, 그래서 나도 후배들에게 뭐든 사려고 노력했다. 없는 살림에. 괜찮아요 물러서는 후배들에게 그래도 내가 커피 한잔은 사줄 수 있다! 호기 아닌 호기도 부렸다.


그 팀의 다른 후배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였냐고. 그도 몰랐다. 하지만 추정되는 바는 있었다. 조용했고, 우직했다. 포장을 잘하지도, 또 좋아하지도 않았다. 아직 연차가 짧았고, 경험이 부족했다. 그 집 팀장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았다는 평에 "그만하면 됐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뭐 얼마나 화려한 퍼포먼스를 기대했던 걸까. 동료들은 "키워볼만 하다"라는 반응이었는데 마음이 급한 팀장 눈엔 아쉬웠던 듯. 당장 사람이 나가고, 다른 대안도 없이 남은 동료들에게 일이 나눠졌고, 그 업무의 무게 또한 남다를 것이다. 당장 사람을 뽑을수도, 또 뽑는 들 그만큼 안정감있게 바로 업무에 붙기도 쉽지 않을터. 동료들의 마음은 무겁고, 지켜보는 나도 안타까웠다.


이 회사. 2014년에 시작해 햇수로 8년째다. 떠나는 사람만도 예닐곱은 족히 봤다. 다행히(?) 자리 잡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는 없었다. 짧게 일할지언정 고민하고 또 고민해 뽑는 것이 사람이다. 아무나 뽑았겠는가. 여러 조직의 사정의 끝에 일하는 직원들의 거취가 결정되니, 본인들의 의지로 나간 몇몇은 그래도 속은 시원했을텐데 의지와 관계 없이 나가야 했던 이들의 마음은 썩 개운치 않다. 그리고 남은 우리의 마음도 썩 좋지 않다. 더 좋은 곳으로, 더 큰 무대로 나가 행복하기만을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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