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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asam Aug 05. 2022

어린아이

 니체는 인간 정신의 3단계를 ‘낙타-사자-어린아이’로 나누고 어린아이의 상태를 인간 성장의 최고점이라고 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 ‘어진 임금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성경에는 ‘어린아이들과 같게 되지 않는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진정한 ‘YES’ 맨입니다. ‘NO’라고 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잘 믿습니다.

      

 토요일 아침 정호는 일 나가는 엄마가 차려 주신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겨우 두 시간이 지난 뒤에는 형과 함께 라면을 먹습니다. 또 점심 때쯤 할머니께서 가져온 쑥떡도 먹습니다. 저녁에는 어머니가 누나 생일 선물로 케익과 통닭을 사 온다고 해 오후 내내 설렙니다. 배가 부른 정호는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봄이 한창입니다. 친구들의 알록달록한 봄 옷 사이로 영희의 겨울 털스웨터가 돋보입니다. 영희는 지난겨울에 생일 선물로 받은 노란 털스웨터를 참 맘에 들어합니다. 봄에 입기에는 다소 더워 보이지만 영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개나리 색깔이라 다행이죠. 영희는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고 생각이 자유롭습니다.   

  

 쉬는 시간에 간식을 먹습니다. 봉지를 뜯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지렁이 모양 젤리 하나가 툭 떨어집니다. 순간 영수가 아깝다는 표정과 함께 허리를 굽혀 주워 먹으려 하길래

 “안 돼. 그건 먹으면 안 돼.”

 내가 한 눈을 판 사이 땅바닥의 젤리가 사라졌습니다. 영수에게 깨끗함과 더러움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1학년 1반과 2반이 합동 체육을 하는 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합니다. 2반 선생님은 출발선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출발시키고 나는 결승선에서 등수를 정해줍니다. 우진이가 예상을 깨고 세 명 중에서 1등을 했습니다. 세상에나! 펄쩍 뛰며  좋아하는 우진이가 오른쪽 신발과 왼쪽 신발을 바꾸어 신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달리기 1등을 했을까요?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국어 시간에 꿀벌 한 마리가 교실에 들어와 맴을 돕니다. 아이들의 시선도 일제히 벌의 꽁무니를 쫓습니다. 역시나 공부하기 싫어하는 순태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입니다. 순식간에 일어나 책받침을 휘두르며 열린 창문 쪽으로 내보내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나머지 아이들도 얼씨구나 하고 일어나 필통, 공책과 같은 무기를 든 채로 군무를 추기 시작합니다. 용맹한 전사들의 기세에 밀려 벌은 하릴없이 추방당하고 말죠. 

 나는 일장 연설을 시작합니다. 꿀벌은 사람에게 유익한 곤충이며 꿀벌의 협동심은 놀랍다고 말합니다. 동물이나 곤충은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는 등의 주관적인 생각을 늘어놓습니다. 말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끝을 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밀어붙입니다. 

 성격 까칠한 진국이가 나에게 한마디 합니다.

 “선생님! 근데 지금 수학 시간인데요.”

 ‘맞다 내가 삼천포로 잠시 빠졌었네.’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날입니다.     


 서울에서 종철이가 전학을 왔습니다. 영준이는 종철이의 서울 말씨에 관심을 보입니다. 자꾸 말을 시켜봅니다. 영준이와 종철이는 오전 내내 껌딱지처럼 붙어 다닙니다. 점심 시간에도 영준이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종철이를 살갑게 챙깁니다. 5교시 쉬는 시간에 영준이는 다른 친구들과 복도 바닥에 앉아서 딱지 따먹기를 하고 있습니다. 종철이는 혼자 교실에 앉아 동화책을 봅니다. 영준이와 종철이의 짧은 우정은 여기까지입니다. 금방 친해졌다 금방 싸우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심각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호가 가방을 깜빡하고 학교에 옵니다. 순호 엄마가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가방을 챙겨 옵니다. 저녁에 엄마한테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호의 즐거운 학교생활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호윤이는 운동장에서 놀다가 교실에 가방을 둔 채로 집에 갑니다. 엄마는 화가 나서 호윤이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호윤이는 숙제를 안 해도 된다고 속으로 좋아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걱정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어른 뿐입니다.

 

 횡단보도 오른쪽으로 어린아이가 손을 들고 건너갑니다. 왼손을 들고 건너가다가 중간 쯤에서 오른손으로 교체합니다. 운전자 쪽에 가까운 손을 들고 운전자와 눈을 맞춥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정직하게 실천합니다. 어른들이 잘못하다가는 큰 일 납니다. 아이들은 걸어 다니는 신호등입니다. 걸어 다니는 폭탄입니다. 어린아이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했다가는 큰 코 닥칩니다. 

       

 버스에서 열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듭니다. 박물관 견학을 다녀오는 아이들입니다.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던 노인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버스에서 내려 뛰다시피 걸어가던 아이들이 저 멀리에 멈추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멈추어 있던 자리에 도착한 노인은 이내 미소를 짓습니다. 구걸하던 사람의 바구니에 수북이 쌓인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 위에 가을 햇살이 환합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발돋움을 하고 높은 담장 너머에 펼쳐진 봄 꽃 세상을 바라봅니다. 실바람에 꽃잎이 살랑거립니다. 노랑나비 흰나비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빙글빙글 돕니다. 아저씨는 꽃 향기를 맡으려고 눈을 감습니다. 향기는 아저씨의 높고 두꺼운 담장을 넘지 못합니다. 차가운 공기만 코 끝에 맴돕니다. 아이들이 쫓겨난 정원에는 봄이 오지 않고 겨울만 계속됩니다. 아저씨는 쓸쓸하게 늙어갑니다. 어느 날 아이들과 작은 새들이 허물어진 담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봄도  아이들의 꽁무니를 슬그머니 따라 들어갑니다. 정원에 꽃이 핍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운동장 한켠에 엄마를 기다리는 연아가 보입니다. 쪼그리고 앉은 연아의 몸이 콩벌레처럼 동그랗습니다. 작고 통통한 손으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립니다. 명작입니다. 땅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연아가 주인공인 운동장 풍경'이 명작입니다. 


   

어린아이는 봄이며 꽃입니다.


어린아이는 빛이며 풍요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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