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아는 방법

뉴질랜드 식 자기소개에 대하여

by Self Belief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 진짜 누구니? 뭐 하고 싶니?

뉴질랜드는 ‘Health and Safety (건강과 안전, HS)’가 중요하다.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속도로 일하던지 간에 ‘HS’에 문제가 생긴다면 엄청나게 큰 일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개인의 인권과 상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뉴질랜드 연구원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신입들을 대상으로 하는 HS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게 됐다.


‘자 자기소개를 해볼게요. 먼저 자기 이름, 그리고 연구원에서 어떤 일 하는지, 마지막으로 자기에 대한 재미있는 정보 하나씩 말하기!’

HS 팀장이 외쳤다. 자기에 대한 재미있는 정보? 뭐가 있지?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고 땀이 났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점차 조급해지기 시작했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사람이 ‘안녕하세요, 저는 O이고요, 저는 여기서 환경시료 분석을 하고요, 저는 매운 것을 엄청 좋아합니다!’ 했다. 그래 금발의 서양남자가 매운 것을 먹다니, 좀처럼 볼 수 없는 아주 재밌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다음 사람은 ‘안녕하세요, 저는 L이고요, 저는 여기서 해양시료 분석하고요, 저는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 했다. 그래 서양 여자가 아시아언어를 할 수 있다니. 재밌다. ‘안녕하세요, 저는 A고, 극지연구하고 남극에 10번도 더 갔었어요.’ 평생 한 번도 가기 어려운 남극을 10번도 더 갔다니. 이것도 재밌다. 내 차례다. 심장이 터질 거 같다.


‘네, 저는 H이고요, 여기서 온실가스 연구합니다.’ 하고 내가 마지막 것을 건너뛰려 하자, 굳이 다시 내 이름을 불러 재차 물었다.

‘H, 자기에 대한 재밌는 거 말해줘야죠.’

‘저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라 재밌는 게 하나도 없는데요… 저는 맥주 마시는 걸 좋아해요….’

아 등신. 머저리. 아 등신! 진짜 머저리! 너는 저게 재밌냐?




한국에서 회의나 오리엔테이션에 들어가서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면, 이름, 직급, 과. 이에 더해 과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도를 말하는 게 다였다. 뉴질랜드는 다양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말하기, 나에 대한 재밌는 정보 말하기,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그 이유 말하기, 제일 좋아하는 노래 말하기 등이다. 매번 머리가 하얗게 된다. 그렇게 매번 내 차례가 되어 아무거나 내뱉고 나면, 이 등신 머저리. 밤새 이불을 걷어찬다.


이런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나는 계속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나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에 있을 때 어느 집이 맛집이라고 하면 그곳을 찾아간 적은 있다.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본 적도 있다. 그때 유행한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나도 내 MBTI정도는 안다.

그런데 진짜 그 어느 것 하나 몸에 남아있지 않고 다 흘러갔다.


어떤 패션이 유행하면 우르르, 어떤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면 우르르, 어떤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 우르르, 무슨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면 우르르.


한국 전체 평균 +/- 표준오차 정도 안에는 어찌어찌 들어와는 있었겠지만 뭐 하나 이유를 가지고 좋아한 것이 없다. 저 MBTI마저도 남들 다 하니까 알게 된 거다. 남이야 이 MBTI를 통해 나를 대충 파악할 수 있겠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도 아니다.


모든 걸 이유가 없이 좋아하니까 뿌리가 없다. 남의 취향이나 따라 하고, 뭘 좋아하는데도 주관이 없이 눈치나 보고 있다.




그럼 좀 나에 대해서 적어보자. 언제 무슨 질문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좋아하는 음식: 엄마가 만든 시금치나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은 커피와 케이크이다. 케이크의 달콤함이 입으로 들어가고 커피의 쓴 맛이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 해피엔딩이지만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보이후드(Boyhood).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실제 한 어린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12년에 걸쳐 찍은 시간압축의 결정체라서. 개인적으로 시간은 물리량 중 가장 위대하다 생각함으로. 한국 영화 중엔 아가씨. 이야기는 해학적인데 미술이 동화 같아서.


취미: 나는 자주 숲에 가서 조류관찰을 한다. 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조건 없이 행복하게 바라볼 거 같아 사랑받는 느낌이 든다. 작은 참새조차도 너무나 이쁘다.


좋아하는 노래: 주로 디즈니나 지브리 애니메이션 등의 주제가. 꿈과 희망이 가득해서. 혹은 가사가 없는 재즈나 클래식. 가사를 들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서. 대부분 좀 조용한 노래를 좋아한다. 그래야 안정감을 느껴서?


좋아하는 책: 데미안. 새해가 되면 꼭 읽고 시작하는 책. 나의 낮은 자존감과 불안감을 향해 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끊임없이 얘기해 주어서. 그런데 왜 맨날 이 모양인가.


나에 대한 재미있는 정보: 아직도 없다. 그나마 새를 보는 게 재밌다면 재미있는 정보인 걸까?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나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잘했다. 물론 완벽성이 높은 한국인의 눈엔 뭐 이만 걸로 잘했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암튼 나는 글쓰기 대회에서 장원도 몇 번 타먹었고, 그림 그리기는 선생님이 불러다 미대입시를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둘 다 돈을 못 번다는 이유를 관뒀다.

잘하는 것과 별개로 어른이 되면 뭐가 하고 싶었는가 하면 (엄마는 의사 같은 걸 하라고 했는데, 성적은 그 근처도 못 가서 포기했고) 개인적으로 배를 만들어서 선장을 하고 싶었다. 혹은 패턴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벽지나, 타일 등에 쓰이는 패턴. 혹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카페 사장님이 되고 싶기도 했고 (레오의 오래된 팬이었다. 지금은 내가 그의 취향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기 때문에 관뒀다.),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아니면 전 세계 쓰레기를 치우고 다니는 사람도 되고 싶기도 했고, 고아원 원장님이 되어 보란 듯이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내고 싶었다.


이중 단 하나도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게 없다. 입시에 들어서자 잘하고 좋아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도 성적 맞춰서 갔고, 학부로 입학해서 학과를 정하는데도 엄마한테 물어봐서 정했다.


작년에 B가 우리 연구원에서 퇴직을 하고 영국으로 떠난다고 해서 송별파티를 했다. 그 파티에서 B를 소개하길, ‘우리 연구소에서 시료를 분석하는 유명한 기술자였고, 또 목걸이와 귀걸이를 디자인해서 전시하는 예술가 이기도 했지요.’ 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치프 사이언티스트 (Chief Scientist) A는 연구소에선 과학프로젝트를 도와주는 리더이지만, 사실 연극배우다. 매년 연극 무대에 선다. 나의 옆 실험실 G는 태권도 선수다. 서양여자애가 나보다 더 태권도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늘 퇴근 후 태권도 훈련 때문에 바쁘다.



모두가 무언가를 하는데, 나만 없다. 나만 미치도록 재미가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마치 은퇴한 남편이 삼식이가 되듯이, 퇴근하고 오면 식충이가 되어있다. 넷플릭스나 보면서 밥을 먹다가 유튜브 쇼츠를 좀 보고 나면 잘 시간이 된다. 매일 급격한 자괴감이 몰아친다.

그리고, 자기소개 시간이 여전히 너무 무섭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 진짜 누구니? 너 뭐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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