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권력과 책임 나누기
비로소,
머리에 올려놓아진 돌은 치워지고,
나는 물 밖으로 나와
끝내는 숨을 쉬었다.
뉴질랜드는 안전에 꽤 엄격하다. 해일, 지진 등 자연재해를 비롯한 인재에 관해 늘 대비하고 연습한다.
연구원 입사하자마자 당일 교육이, 각 사고에 대한 싸이렌 소리(사건사고에 따라 싸이렌 소리가 다르다.)와 그 때 모이는 장소(사건사고에 따라 모이는 장소가 다르다)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생존가방을 기본적으로 지급받았는데, 응급시 이 가방을 메고 대피할수있도록 안내한다. 나처럼 실험을 하기 위해 밖에 나가야 한다면, 보호신발을 따로 사준다. 혹시라도 몸이 잘못되는 경우보단 신발을 지급하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여긴다.
외부에서 손님이 와서 함께 회의를 할 때도 회의 주최자가 동일한 정보를 알림으로 회의를 시작한다. 해일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 어디로 대피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안내이다.
또한 주기적으로 훈련을 진행한다. 그래서 때론 느릿느릿 건물을 빠져나올 때도 있다.
뉴질랜드에 온지 한 3개월차 됐을 때, 오늘 10시경 화재 대비 훈련이 있을 예정이오니, 참고 바랍니다.’ 라는 메일이 왔다. 그리고 예정된 비슷한 시간 J가 내 오피스 방문을 노크하며 ‘H, 이산화황 가스가 누출됐어요. 지금 탈출해야 돼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훈련 중 일부로 여기고 천천히 건물 밖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가스 누출은 훈련이 아니라 실제 였다.
가스 누출이 일어나자 실험실의 Health and Safty (HS, 건강과 안전) 담당자들이 건물의 모든 오피스에서 사람을 탈출 시켰다. J도 그 중 하나였다. 알람을 못 들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으로 모이자, 원장과 HS팀이 바람의 방향 등을 확인하여 전체 인원이 모여 있을 곳을 결정했다. 각 부서의 HS 담당자들은 본인부서 인원의 탈출기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원장과 HS팀이 향후 행동을 지시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했고 최종적으로 연구소 식당에 모여 앉았다. 매 30분에서 1시간마다 원장들이 번갈아 등장해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을 업데이트 해주었다. 혹시나 배가 고프다면, 원장명의로 카페와 식당의 음식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실시간 메일도 보내 상황을 알렸다. 가스누출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은 당장에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실려갔다. 사건 이후에는 직원들의 트라우마 관리를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뉴질랜드를 새롭게 보게 됐다. 뉴질랜드의 재난 대처 시스템은 꽤나 구체적이고, 세분화되어 있었다.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뉴질랜드는 책임과 권위를 나눈다는 것이다. 원장이라도 HS 팀이 전문가라고 믿고 그들의 지침에 따른다. 우선 우리 연구소는 전국적으로 지부가 있는데, 내가 일하는 웰링턴이 가장 크다. 약 300명이 일한다. 웰링턴 지부의 원장은 3명이다. 이 중 지역 대표 HS 팀은 총 5-7명이다. 그리고 실험실의 HS 책임자가 따로 있고, 각 부서의 HS 담당자가 있다. 이토록 위급한 상황이 있다면 이들이 리더가 된다.
HS 업무는 기본적으로 자원하는 업무다. 이런식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부수적 업무들은 나중에 승진할 때 큰 장점이 된다. 지역 대표 HS 팀들은 분기별로 모여. 각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사고 혹은 발생할 수 있는 사건사고에 대해 논의한다. 또한 사건사고에 따를 수 있는 모든 지침들을 세분화하거나 혹은 개발한다. 예방 차원에 필요한 교육제도를 도입하기도 한다. 재임기간은 2년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는 다양한 부서의 다양한 관점을 가진 인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지침을 더욱 세분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기 어렵고, 모든 것에 전문가이기 어렵다. 그 때 권력과 책임을 나눠주면 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함께 하기 때문에 모든 과정은 더욱 세분화되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지침을 개발했으므로, 실제 일이 닥쳤을 때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가스누출소동이 일어난 그 날, 원장들이 형광조끼를 입고 HS팀과 함께 깃발을 흔들며 전체 직원들을 향해 ‘모두 이쪽으로! 이쪽으로!’ 하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느꼈다.
나는 이런 것이 필요했다. 누군가 머리위에 무거운 돌에 올려놓아 물 안에 잠겨 숨막히다 느꼈는데, 그 장면을 본 순간 나는 해방된 것 같았다.
비로소, 머리에 올려놓아진 돌은 치워졌고, 나는 물 밖으로 나와 끝내는 숨을 쉬었다.
얼마전 각 지역 대표 HS팀을 선출한다는 공고가 났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HS팀에 지원을 하게 됐다. HS팀에 지원하기 전 반드시 원장과의 면담을 거쳐 지원을 받아내야 한다.
원장이 내게 물었다. '왜 하고 싶은가요?' '가스누출 사건이 있을 때 대처 방식에 진짜 감동받았거든요. 여기 시스템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실험실에서도 일하고, 실험을 하러 필드로도 자주 나가니까 제가 피드백을 해주면 HS 지침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곧 원장의 지원을 얻어냈고, 지원자가 너무 많으면 선거로 이어진다고 했으나 운 좋게도 딱 맞춰 HS팀에 들어갔다.
HS 팀의 첫 회의를 마치고, 나는 마치 내가 꽤나 큰 기여를 한 것 같은 큰 기쁨에 휩싸였다.
회의에서 나는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상황을 업데이트했다.
'가스누출로 잠시 멈췄었던 이산화황 분석을 얼마 전 다시 시작했어요. 가스실험실을 이용하는 모두가 산소통을 매고 탈출하는 훈련을 3일 동안 받았고요, 가스가 무거운 특성에 따라 알람 시스템을 바닥에 추가 설치하였습니다.' 하자 전체 HS 부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H! 정말 중요한 정보에요. 우리 모두가 진짜 조심해야 하거든요. 향후 이 지침에 대해 업데이트 하기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