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유연성이 있는 뉴질랜드?
어쩌면 안정이란 굴레에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두고 있는 것일까?
내가 뉴질랜드에 온 지 1년이 막 지났을 때 불현듯 해고의 바람이 불었다. 국가 공무원(정규직)이라도, 무조건 인원을 삭감하겠다는 정부의 지침이 내려왔다. 전체의 10%. 갑자기 약 90명을 자른다는 거였다. 뉴질랜드는 원래 천천히 운영되는 나라라 정부가 이 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나는 ‘뭐 한 2-3년 걸리겠구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인원 삭감 계획이 발표가 나자, 당장 그다음 주에 어떻게 자를 것인지에 대한 스케줄이 나왔다.
대략 방법은 이랬다. 1) 먼저 해고 대상자 명단을 준비하고, 2) 해고 대상자에게 통보를 한다. 3) 해고 대상자들은 각 지역 연구소 원장과의 상담을 통해 이유를 듣는다. 4) 해고 대상자들은 반론 리포트를 만든다. 5) 리포트와 자신을 지원해 줄 사람들(수는 상관없고 노조여도 상관없다)을 동반하고 다시 상담을 진행한다. 6) 상담결과와 리포트는 인사과로 전달된다. 7) 인사과에서 납득을 한다면 해고되지 않지만 인사과에서 납득이 안된다면 인사과도 반론 리포트를 만들어 다시 통보한다. 8) 이제 해고 대상자의 선택이다. 다시 한번 반론할 것인가? 아니면 해고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 과정이 약 1-2개월에 걸쳐 빠르게 일어났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더군다나 나는 한국에서 그 좋다는 (지금은 인기가 땅에 떨어진) 공무원을 관두고 뉴질랜드로 온 거였다. 그런데 오자마자 잘린다고? 아무리 평생직장 없다지만 이게 말이 돼? 와 인생이 진짜 드라마구나! 밤마다 생각했다.
다행히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뽑힌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판단할 것이 없었다. 명단의 대상은 대부분 은퇴 제시 연령 이후(65세)에도 다니고 있거나 혹은 월급만큼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직급은 상관없었다.
은퇴 제시 연령을 기준하는 것은 쉽지만, 월급만큼 일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객관적 지수라면 말은 달라진다.
- 첫째로 업무분장(역할을 적어 놓는 문서)이 명확하다. 두 사람 이상 업무분장이 겹치면 당연히 같은 일에 두 명이나 고용할 필요 없음으로 그 대상이 됐다.
- 두 번째로 독특한 일의 구조가 있었다.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그룹 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을 부여하고, 그 일에 필요한 시간을 배분한다. 능력이 좋은 사람일 수록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H인 내가 프로젝트 A부터 D까지 참여하여 각 프로젝트 매니저로부터 그 일에 해당되는 시간을 배당받고, 1년인 1950시간을 채우는 형식이다 (내가 일하는 연구소의 경우 하루 7.5시간 일하는 것을 기준 한다. 아래 표를 참고하시라.). 그러나 내가 생각보다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프로젝트 매니저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일을 잘하는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 그럼 나는 1950시간을 못 채우게 되는 것이다.
<표 1. H 씨의 365일 시간을 채우는 방법>
프로젝트의 완성도는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달려 있으므로, 프로젝트가 잘 이행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을 잘 못하는 직원의 시간을 잘하는 직원에게 옮길 수도 있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프로젝트 매니저 자신의 시간을 다른 이에게 줘야 하는 상황도 당연히 생긴다.
그렇다면 1년, 1950시간을 못채운 H의 월급이 삭감되는가? 아니다.
월급은 그대로 받는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월급 루팡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사과에서는 총 프로젝트 참여 시간을 보면, 각 직원들의 일 참여도와 성실성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그룹에서는 5분이 해고됐다. 4분은 은퇴 나이가 넘거나 다가와서 (앞서 말했던 연구소에 60년을 다니신 분도 해당이 됐다), 그리고 1분은 본인이 직급이 높은 프로젝트 매니저였으나, 1년동안의 시간이 부족해서. 치열하게 방어했으나 결국은 해고로 끝났다. 1분은 업무분장이 동일해서 대상자에 올랐으나, 잘 방어해서 살아남았다.
그 과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뉴질랜드 같지 않게 지독히도 빠르게 진행됐다. 매일매일 새로운 소식이 업데이트되었다. 누가 살아남았데, 누가 어디로 재취업했데 등, 그러나 신기하게도, 해고된 사람들은 또 금방 직장을 구해서 나갔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 중 일부는 독일 기상청, 영국 기상청 등으로 나갔고 뉴질랜드 내에 또 다른 과학 기관이나 대학으로 옮기기도 했다. 물론 은퇴가 예정되신 분들은 뒤끝 없이 개운하게 떠났다. 나는 해고되는 속도도 놀라웠지만 채용되는 속도도 놀라웠다. 저런 고급 일자리들이 수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일을 못해서 잘랐는데, 다른데 취업을 쉽게 하는 것도 놀라웠다.
뉴질랜드뿐 아니라, 서구권 문화에는 추천인(reference) 제도가 있는데, 전 직장의 동료나 상사가 그 동안 이 사람일을 잘 해냈음을 보증해 주는 제도다. 이력서를 낼 때, 이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거나 그들의 레터를 받아 함께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야길 들어보니, 여기서 잘린 사람들이 새 직장을 구할 때 연구원 차원에서 좋은 추천인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여러모로 일을 적극적으로 잘 하면서 대인관계를 잘 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직장을 옮길 때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면에서 한국 보다 확실히 빡세다.
한편으로는, 꼭 해고당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자리를 가졌어도, 더 좋은 일자리를 위해 쉽게 떠나기 때문에 일자리의 회전율이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을 폄하하여 안정이란 굴레에 가둬놓고 그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