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수치 I

Thank you라고 그냥 말해 제발.

by Self Belief
영어에서 ‘겸손’과 ‘수치’는 어원이 같다.
나는 가짜 겸손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외국에 살아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해서 없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매일 그나마 있던 자존감마저 바닥날 판이었다.

일단 영어가 문제였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땐 미국식 영어를 배운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이 너무 많았다. 내가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Pardon?)할 때마다 너무 민폐를 끼치는 거 같아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럼 그들이 다시 내게 뭐라고요? (Pardon?)하고 물었다. 그럴수록 기가 더욱 죽어서 목소리는 더욱 기어들어갔고, 그들은 더욱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죄송한데 뭐라고요? (I am sorry, pardon?)을 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완벽한 악순환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정말 터져버리기 직전의 풍선처럼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뇌가 과부하되는 걸 느꼈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곧잘 한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실제로 해외에서 영어의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여행이 아닌 삶은 달랐다. 정말 처음으로 외국사람들과 말을 하기 싫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영어가 아니었다. 순간순간 기가 죽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가진 그 특유의 완벽성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절대적 완벽성을 추구한다. 그 완벽성의 배후에는 자신의 기준도 있지만 타인의 기준도 있다. 본인이 잘한다고 느끼더라도, 남들이 ‘뭘 저걸 갖고 자랑을 해’ 하거나 ‘저게 잘하는 거야?’ 해버리면 그건 잘하는 게 아닌 게 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험을 보고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집에 놀러 오셨다. ‘시험 잘 봤니?’ 하시기에 ‘네 잘 봤어요.’ 하고 대답했다가 할머니에게 혼이 났다. ‘절대 잘 봤다고 말하지 마. 잘 봤어도 못 봤다고 말해. 사람들이 싫어해.’


우리는 그렇게 성장했다. 일종의 겸손 같은 거였다. 저렇게 계속 못 봤다 못 봤다 노래를 불렀다. 말이 씨가 됐는지 정말 성장할수록 시험을 못 봤다. 그러다 사회에 나가선 ‘아니에요, 저게 뭘요, 잘한 것도 아니죠.’ 식으로 계속 본인을 알아서 낮추기 시작했다. 누가 칭찬을 해도 ‘아니에요. 별것도 아니죠.’ 했고, ‘누가 해볼 사람?’ 하고 질문을 받았을 때 만일 손이라도 들면 정말 지독하게 잘 해내야 했다. 아니면 뒤에서 ‘아니 지가 한다고 그래놓고 저게 한 거야?’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이런 나와 타인의 완벽성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고, 최대한 자기를 미리 낮춰놔야 나중에라도 저런 타인의 원망을 피해 나갈 수 있었다.




외국은 달랐다. 뭐든지 자신감이 있었다. 정말 더럽게 못하는데도 ‘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하면서 손을 들고 나섰다. 실제로 그들에게 재능이 있었는가 물으신다면,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말 바닥인 사람들도 있었다. 형편없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창피하지도 않나? 왜 저래?’

심지어 나의 그 습관 같은 ‘아니에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라는 말 때문에 생에 처음으로 겸손하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한국에서는 정말 싹수없기론 둘째라면 서러웠었다. 저 정도는 기본 장착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결국 나를 모지리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겸손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이 될수록 진짜 나는 그 일에 기여하지 않은 거처럼 됐다. 쇼크였다. 친한 동료가 나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충고했다. ‘H, 너를 너무 낮추지 마.’


해고의 바람이 불고, 그 자리를 채울 사람들이 필요했다. 프로젝트 리더가 공개회의를 열었다. 새로운 프로젝트 매니저를 뽑겠다는 얘길 했고 새로운 프로젝트의 섹션리더를 뽑는 다고 했다. 한두 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나보다도 경력이 짧은데도 본인들이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DNA칩을 달고 다니는 나는 차마 내 입으로 내가 하겠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한국 사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누가 승진을 손을 들고 시켜달라고 하나? 위에서 아래로 지명하여 뽑는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너무 내가 바보 같다고 느꼈다. 너, 진짜 이렇게 계속 살 거야? 계속 겸손한 자세로 남들이 나의 열심을 알아봐 주길 기대하며 살 거야? 진짜 이럴 거야? 나는 내게 계속 되물었다. 겸손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는 사회인데도, 계속 겸손하게 살 것인지. 그리고 그거 진짜 겸손 맞아? 창피해서 숨은 건 아니고?




영어에서 ‘겸손(Humility)’과 ‘수치(Humiliation)’라는 단어는 어원(lowly, 낮춤)이 같다. 이 두 단어의 차이점은 ‘스스로의 존중과 가치를 잃어버릴 때’ 겸손이 수치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간 해왔던 겸손을 생각해 보면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혹은 예방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우리가 진짜 겸손했는지 아니면 수치받지 않기 위한 가짜 겸손이었는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다. 만일 나 스스로를 내가 존중하고 있다면, 누군가 나를 칭찬했을 때 ‘별거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라고 표현해선 안 됐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평가해 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엔 이거보다도 더 잘할지도 모르니까 긴장하세요!’라고 말했어야 맞다.


나는 가짜 겸손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뭐 쪽팔리면 뭐, 말지 뭐. 나는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정말이다.


나는 프로젝트 리더에게 솔직하게 메일을 썼다. ‘안녕하세요, 저 H에요. 늘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 경력으로 치면 프로젝트 매니저에 지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다만 한국사회에서는 승진을 자원한 사람 중에 시키지는 않습니다. 리더들이 뽑아서 결정하고 알려주는 시스템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까 손을 들기가 어려웠어요. 이러한 행동이 일을 하기 싫어서 피하는 것처럼 혹은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한국인이라 고치기가 쉽지 않네요. 그러나 어떤 일이든 저는 즐겁게 받아들이고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이 메일을 받은 프로젝트 리더는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주에 프로젝트 매니저로 승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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