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불되나요?

정직이 중요한 뉴질랜드 사회

by Self Belief
여기는 믿음이 시스템이에요.


뉴질랜드에 와서 일을 시작한 첫날, 한 3시-4시부터 사람들이 슬슬 퇴근하기 시작하더니 5시가 넘어가자 연구원 건물이 텅텅 비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4시부터 퇴근하지도 않지만, 저렇게 쉽게 사무실을 떠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부서 매니저에게 가서 ‘저, 저도 지금 퇴근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매니저가 ‘H, 여긴 감옥이 아니에요. 가고 싶으면 언제든 가면 돼요.’ 하고 웃으며 말했다.

덧붙여,

‘나는 H가 언제 와서 언제 가는지 알 필요 없어요. 만일 그냥 집에서 일한다고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예요. 만약에 늦게 와서 일찍 집에 간대도 집에 가서 일하겠지 생각할 거예요.’

‘왜요? 만약에 제가 집에서 일한다고 하고선, 집에서 일을 안 하면요?’

‘그럼 그건 H의 잘못이지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리 연구원은 믿음이 시스템이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의 정직이 사회에서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옆 그룹의 프랑스인 M도 나와 비슷한 얘길 했다. 그가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나타났길래, ‘M 휴가 갔었어요? 한동안 못 봤네요.’ 하자 ‘코비드에 걸렸었어요. 그래서 집에 일주일간 쉬다가 오늘 출근했어요. 그런데 연구원에서 코로나 확진서 같은 걸 내라고 하지도 않네요. 매니저가 하는 말이 일주일 정도는 증서가 필요 없대요. 프랑스랑 다르더라고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연구원뿐 아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뉴질랜드에서는 매일매일 일어났다.




하루는 마트에서 전구를 샀는데 내 탁상조명과 호환되지 않는 것을 샀다.

나는 그다음 날 다시 그 마트로 가서 ‘제가 어제 여기서 전구를 샀는데 호환되지 않는 것을 샀어요. 그래서 다른 타입으로 바꿔가려고요.’ 하자, ‘그럼 바꿔가세요.’ 하고 나에게 길을 내줬다.

불투명 종이 박스 안에 전구가 그대로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길을 내주는 것이 의아했다. 심지어 본인이 직접 바꿔 주는 것도 아니고 바꿔가라니.

‘아니 박스 안에 전구가 실제로 들었는지 아닌지 확인 안 하세요? 영수증 확인이라던가.’ 내가 오히려 묻자 그가 웃으면서 ‘그럼 그 박스에 아무것도 없어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렇게 알아서 전구를 바꿔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전날 양파 여러 개를 샀는데 그중 하나가 썩어있었다. 그 썩은 양파를 들고 마트로 가자 이번에는 마트 직원이 영수증을 확인했다. 그리곤 영수증에 쓰여 있는 금액대로 양파를 산 돈 전체를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아니요, 저는 환불은 됐고, 이 썩은 양파 하나만 새것으로 바꿔가고 싶어요.’ 하자, ‘그럼 새 양파도 가져가고, 돈도 가져가세요.’ 했다.

‘그 양파가 여기서 산 양파인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을까 봐 불안했던 마음은 ‘이렇게 쉽다고?’로 바뀌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전구를 사면 영수증이 있어야 했고, 전구 박스의 스티커를 뜯었다면 교환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일찍 퇴근하면 일찍 퇴근하는 이유를, 재택을 하면 재택 하는 동안 무슨 업무를 했는지 따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서 시간을 보냈고, 코로나에 걸렸다면 진짜로 걸렸는지 병원에서 증서를 갖고 와야 했다. 매일매일 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나는 성실하게 일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어떨 땐 저 모든 증명이 귀찮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런 행위들이 필요 없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되기도 한다.


믿음을 답보로 하는 사회는 일단 믿어 주기 때문에 이렇게 매번 증명을 해야 하는 일종의 레드테이프 (Red Tape, 불필요한 형식 혹은 절차)가 없다. 그렇기에 보다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정직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보다는 정직한 사람의 신용이 통용되는 사회가 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뉴질랜드에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테이블에 있는 지갑은 훔쳐가지 않지만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날 지갑을 잃어버렸고, 경찰서에서 찾았다.) 자전거는 훔쳐간다. 우리나라는 단순히 자전거를 훔쳐가서 당근에 팔지 모르지만, 뉴질랜드는 훔친 자전거들을 모아 컨테이너에 싣고 해외로 수출(?)을 하는 조직들이 있단다. 좀도둑의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사회가 그 사람을 믿어주었는데 거짓말을 했다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그 말을 믿어 준 사회는 잘못이 없다.


양파를 환불받다가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 말을 믿어주어서, 내가 정직한 사람이란 걸 믿어 주어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하자 점원이 답한다.

‘뭘요, 양파는 겉으로 보면 썩었는지 잘 모르거든요. 칼로 썰어봐야 알지만, 우리가 매번 썰어서 팔 순 없잖아요. 그냥 모두 괜찮을 거라고 믿고 파는 거예요. 그 걸 믿고 사셨으니 당연히 환불도 해드리고 새 양파로 교환도 해드려야죠.’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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