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말하지 마 제발.
뉴질랜드 사람들은 칭찬엔 공격적이고,
실수엔 방어적이다.
그런데 나는 늘 반대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자 우리 그룹은 홈파티를 하기로 결정했다.
보통 홈파티를 하면 호스트가 준비를 하긴 하지만 각자가 나눠 먹을 음료나 음식을 해온다.
나란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요리계의 똥손들 중 최상위 똥손이다.
친구들과 놀러 가서도 게임의 벌칙이 'H가 한 음식 먹기' 같은 거였다.
밥은 태우고, 찌개는 간을 못 맞췄고, 김밥은 터졌으며, 만두를 찐다고 했다가 면포를 태워 불을 낼 뻔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를 동반하는 나의 요리는 보기에도 안타깝고 맛도 보잘것없는 그런 것이었다.
코로나 시기조차 배달음식에 기대어 절대 싱크대를 더럽히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홈파티에 음식을 해가려고 하자 막막했다.
저 거지 같은 음식을 내입에 넣는 것이야 괜찮지만, 어떻게 남의 입에 넣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맛있는 한국음식을 거지처럼 만들어가서 괜한 선입견을 준다면 그것은 K콘텐츠가 범람하는 이 시기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 가서 큰 피칸파이 한판을 사 갖고 갔다.
다들 무언가를 준비해 왔는데, 나만 마트에서 사 온 게 좀 멋쩍어서 '마트에서 피칸 파이를 사 왔어요.' 하고 선수 쳐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따로 나를 불러서 '그런 말 굳이 할 필요 없어요.' 하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해줬다.
왜? 그런 말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의아했다.
그리곤 얼마 후 출장을 가다가 차사고를 크게 냈다.
차의 한쪽 바퀴가 도랑 같은데 빠졌는데 그걸 빼보겠다고 액셀을 밟고 운전을 하다가 그만 핸들이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아, 'bank (흙이 쌓인 둔턱 같은 곳)'에 차를 박은 것이다.
결국 과학원의 사이트 서비스 팀이 출동해서 차를 견인하고 우리 부서 사람 중 하나가 나를 데리러 왔다.
'H, 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근데 저는 모두가 알아도 상관없는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뭐라 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모두가 알 필요는 없잖아요. 다만 나는 절대 H를 판단(Judge) 하지 않아요.'
나는 기분이 묘했다. 그러니까 너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말하지 마.라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사고 보고서(Incident report)를 쓰는 동안에도 나를 픽업 온 동료는 자신이 그 보고서를 봐주겠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사건을 고쳤다. 그러니까 솔직하지 않게 썼다는 것보다, 단순하게 수정했다는 편이 맞겠다.
예를 들면 '그만 핸들이 컨트롤되지 않아 지그재그로 운전이 되다가 둔턱을 받았다.'라고 표현한 부분을 '운전을 하다가 서서히 둔턱을 받았다'라고 고치면서 '컨트롤이 되지 않아' 등의 표현을 삭제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굳이 H를 판단(Judging) 하게 할 필욘 없잖아요.'
나는 그제야, 크리스마스 때의 충고와 차사고 때의 충고가 결국 같은 거란 걸 알았다.
뉴질랜드 사람들 (혹은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저는 그 정돈할 수 있어요.' '저는 잘해요.' 하고 말하는 것과 '다른 이가 나를 판단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나는 심지어 누가 치켜세워줘도 '저는 별로 한 것도 없어요' 하고 말하고 '내가 차사고를 냈잖아'라면서 자신의 잘못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수 쳐서 무안당하지 않기 위해) 솔직히 털어놓은 것이 같은 맥락이듯이.
우리나라엔 잘한 일에는 겸손, 그리고 잘못에는 인실직고라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내가 잘한다고 스스로 말했다가 망치면 망신을 당하듯, 내가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나중에 사람들이 내 잘못을 알게 되면 왠지 거짓말한 것 같은 죄책감을 갖게 된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칭찬엔 공격적이고, 실수엔 방어적이다.
나는 반대다. 나는 칭찬엔 방어적이고, 실수엔 공격적이다 (그러나 이도 들여다보면 방어하기 위해 먼저 공격하는 꼴이다).
뉴질랜드에선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엄청난 실례다. 혹시 실례가 될 거 같으면 얼른 'No, I am not judging you. (나는 너를 판단하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의 판단은 좋게 평가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쁘게 평가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또한 그런 평가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경계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한국에서 익혀왔던 모든 겸손의 행동들은 여기선 수치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H. 칭찬을 받으면 'Thank you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잘못한 게 있다면 떠벌리지 마. 가벼운 것이라도. 너는 바보가 아니잖아.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