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은 집

뉴질랜드 삶의 속도로 늙어가기

by Self Belief
나는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나?



내가 다니는 연구소 앞에 2년이 넘도록 지어지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단층 짜리, 정말 작은, 심지어 벽돌로 짓지도 않는, 컨테이너 형태의 집이다. 카페인지, 식당인지, 아니면 사람이 살 집인지 아직도 모른다. 내가 연구소에 입사하기 전부터 뼈대를 갖고 짓고 있었는데,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성을 못했다.


뉴질랜드는 모든 일이 이런 식이다. Health and Safety(건강과 안전, HS) 때문인지, 워라밸 때문인지, 무엇인지 모를 이유로 모든 일이 천천히 진행된다. 누구든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혹은 개인의 삶을 보호해야 하므로. 온 세상이 느리게, 느리게, 느리게, 그래서 너무나 느려 터지게! 흘러간다.


직장에서도 개인이 항상 먼저이다. 팀에서 급하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스케줄이 먼저고, 그다음 본인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이고, 그다음이 팀에서 급하다고 하는 일이다. 주말엔 절대 일하는 법이 없다. 그러기에 팀 차원에서 일 하나 하려면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속에서는 불이 난다. 그러나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에선 4개월이면 끝났던 비슷한 일이, 여기서는 1년 반동안 진행되고 있으니 말 다했다.


2년 동안이나 짓고 있는 저 정도 크기의 건물이면 한국사람들은 아마 ‘오, 한 6개월이면 짓겠는데?’ 할 거다.


우리나라는 모든 게 빠르다. 이런 시스템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비자를 받는데, 범죄사실기록을 떼어야 한다고 해서 인터넷으로 5분 만에 받아냈더니 모두가 ‘와!’ 하고 탄성을 냈다. 다른 나라에선 3개월이 지나도 겨우 될까 말까 한 일이란다. 우리나라에선 10분이면 은행계좌를 만들 수 있지만 뉴질랜드에선 때론 대략 한 달이 걸린다.




민족이 천성적으로 빠른 건지 혹은 빠르게 발전하기 위해 천성이 빨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는 정말 빠르게 발전해서 전쟁 직후에서 50-60년 만에 세계 10위안에 드는 선진국이 되었다.


모든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그것마저도 최첨단이다. 한국의 국가연구소는 뉴질랜드에 비하면 돈도 넘쳐난다. 한국은 분명 잘 사는 나라임이 틀림없었다.


이렇게까지 한국이 발전한 데는, 어르신들의 수고가 분명 있었다. 그들은 지독히도 근면 성실하게 일해, 근대화를 이루어 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자기들처럼 살지 말라고 부추기며, 살아온 삶을 스스로가 부정해 왔다.


그러나 일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아직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나조차도 한국에서 일할 땐 늘 갈아 넣는 느낌이었다. 11시에 퇴근한 밤이면 시원한 맥주 한잔이 반드시 필요했던 건,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해도 하루 종일 달린 거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소파에 늘어져 티브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꾸고 있는 아빠를 이해하는 순간이 반드시 왔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삶을 후배들이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아직도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내가 부러 우기지 않으면 내 몫과 차례는 오지도 않을 거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거칠게 행세한다. 어쩔 땐 노골적으로 지난 수고에 대한 인정을 강요하는 거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경우 행복하지 않다.


반면 어르신들이 만들어 낸 가난을 모르는 세대는 그다지도 교양이 있다. 그렇지만 그 세대도 별로 행복하진 않다. 바쁘고, 피곤하고, 지친다.


그래서 사실 어르신들과 어울리기가 어렵다.




뉴질랜드에 오니, 어르신들이 유독 유쾌하고, 활기차고, 친절하고, 젊었다.

우리나라완 달리 젊은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잘 어울렸다. 젊은이들만 혹은 노인들만 가는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따로 있지도 않았다.


축제가 열리면, 어린아이, 청년, 장년, 어른, 모두가 나와서 축제를 즐겼다. 노인들도 청년들도 함께 춤을 췄다. 영화관에 가더라도 어른들이 잔뜩 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할머니들도 산타클로스 모자를 쓰고 루돌프 머리핀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시고, 할아버지들도 멋진 옷을 차려입고 다녔다.


언제 한번 친한 언니가 뉴질랜드에 놀러 왔을 때, 나는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언니, 여기 어른 들은 정말 젊은 거 같아. 심지어 우리 연구원에는 60세가 되신 분이 아니라 60년을 다니신 분이 계시다! 대단하시지? 그런데 아직도 실험하고 내 키 만한 가스통을 옮기셔.’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만약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60년을 일했다면, 그렇게 젊을 수 없을 거 같아. 얼마나 힘들었겠니?’


어쩌면, 천천히 발전한 나라는 발전의 속도가 전 세대에 걸쳐 있어서, 세대 간 문화 차이가 좀 덜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HS 같은 걸 지키면서, 혹은 개인의 워라밸을 누리면서, 천천히 일했으니 노인들의 몸과 맘이 덜 늙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의 나는 2년이 넘게 지어지고 있는 건물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바라볼 수 있었을까.

혹은 한 달 넘게 은행계좌를 만들기 위해 기다릴 수 있나.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는 있나.

그래서, 우리 노인들은 조금 천천히 늙고, 청년들은 이전 세대와 다른 속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린,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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