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에서 못 받은 이천만 원

1995년 6월의 어느 날, 그때 그 돈을 받았더라면.

by 어른돌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평생 건설현장에 몸담으셨다. 젊은 시절엔 중동의 모래바람과 싸우던 건설 역군으로, 결혼 후엔 신도시 열풍을 타고 호황기를 겪던 소위 ‘공사판’에 계속 몸담으셨다.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처음으로 '인지' 했을 무렵, 아버지는 직원들을 데리고 공사를 도맡아 하던 현장소장이었다. 사실 그게 정말 현장소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봤을 땐 하도급 업체의 매니저 역할로 추정된다. 그래도 가끔 아버지 따라 현장에 나가면 "형님 형님"하며 아버지를 따르는 아저씨들이 많았고, 함바집이라도 들어가면 아주머니께서 "아이고 아들이여?"라며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한식 반찬들을 잔뜩 내주셨으니 공사장 내 아버지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는 있으신 듯했다.


그 시절이 원래 그랬는지, 아버지가 평생 공사현장에서만 일하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주지 않는 이들의 핑계는 늘 다양했다. 30대 후반이 되니 대강 사회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보이고 그때의 아버지가 결코 돈을 받고 싶은 의지가 없어서 못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게 됐지만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이던 당시 내가 보기엔 참으로 답답했다.

사실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다 보니 중간에 누군가가 돈 지급을 하지 않거나 자기가 가져갈 돈의 비중을 높인다거나 하면 아래에도 제대로 급여의 배분이 이뤄질 리 만무했다. 중간관리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을 믿고 와서 일을 한 후배 일꾼들의 월급을 자신의 돈에서 먼저 챙겨줬고(이는 늘 어머니가 불만처럼 이야기하던 것으로 나는 양친 모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후에 일감을 준 사무실에 가서 공사 비용을 한 번에 정산받곤 했는데, 가끔 지급된 비용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차액에 대한 손해는 고스란히 아버지의 몫이었다. 게다가 가끔 돈을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더웠던 그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무더웠던 유월의 어느 날, 아버지는 자주색 에스페로를 끌고 ‘경기도 이천’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못 받은 이천만 원을 받기 위해 나섰다. 목적지는 서초동에 있는 작은 건설회사 사무실이었고 어머니가 동행했다. 혼자 가는 것보다 두 사람이 같이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셨나 보다.

어머니는 그날을 비교적 똑똑히 기억하셨다. '이천에서 못 받은 이천만 원'이기에 확실히 기억난다고 덧붙였다. 그날 어머니께선 서초동으로 향하는 에스페로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께 “오늘 돈 받으면 그때 공사했다던 백화점이나 한 번 가보자”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현장 소장이 되기 전 여기저기 닥치던 대로 알바를 해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는데, 대표 포트폴리오가 롯데월드에 있는 신밧드의 모험, 그리고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었다. 아버지는 공사가 완료되면 바닥이나 벽면의 경계 부분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미장(plastering) 기술자셨는데, 그래서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백화점의 후반 작업(?)에 참여하셨다.


그날도 부모님은 빈 손으로 돌아오셨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려고 TV를 켰는데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뉴스를 듣고 주방에서 달려오신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 저기 아까 갈려고 했는데. 사람들 어떡하니"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한순간의 선택이 좌우한다. 부모님은 많고 많은 날 중 하필 1995년 6월 29일 오후에 미수금을 받으러 나섰고 하필 그 사무실은 서초동에 있었으며, 가는 길에 삼풍백화점으로 향하는 표지판을 보시고선 오는 길에 들리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받지 못한 미수금이 부모님의 기분을 잡치게 했다. 사무실에서 어떤 고성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화가 나신 두 분은 그냥 집으로 오셨다. 백화점은 오후 5시 57분에 무너졌는데 부모님이 서초동 사무실을 출발한 시간은 4시 반 정도였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부실한 설계·공사·유지관리, 경영진들의 무능하면서도 미개한 대처로 아무것도 모르던 죄 없는 시민 502명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난 주변에 말은 안 했지만 늘 생각했다. 그들이 우리 부모님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해 여름이 지나고 우리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으며 강아지를 가족으로 맞이했다. 2005년엔 아버지 사업이 망해 아파트를 팔고 옥탑방으로 이사도 갔으나 다시 재기에 성공(?)해 작은 빌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아버지는 2012년에 뇌출혈로 수술을 하셨으나 지금은 건강하게 생활하고 계신다. 백화점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젊어 보이는 것을 무기 삼아 6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백화점'에서 일하신다. 늘 무릎과 허리가 아프다고 골골대시지만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으시는 듯하다. 1995년 6월의 그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삶도 사실 이렇게 평범하게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부모님이 그곳으로 향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이천에서 못 받은 이천만 원'은 끝끝내 받지 못했다. 가족은 그 돈을 잊은 지 오래고 아버지는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한국은행의 소비자물가지수 화폐가치 환산에 따르면 1995년 6월의 2천만 원은 2021년 8월 현재 가치로 약 4천만 원에 준하는 금액이라지만, 받지 못한 것이 전혀 아깝진 않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그것 이상의 삶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기에. 그리고 지금 당장 안 풀리는 일이 있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내게 영향을 줄지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초초해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PS) 사실 그날 어머니께선, 돈은 받지 못했지만 오래간만에 강남에 나왔으니 기분 전환 겸 삼풍백화점에 들러 구경도 하고 내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던 학용품 세트도 사고 장도 보고 할까 하셨다는데 '빨리 가서 애 밥 줘야지'라는 생각에 그냥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안 하셨다고 했다. 그때 '엄마 밥'을 얻어먹던 6학년 초등학생은 사십이 다 되도록 집에 얹혀살면서 지금도 질리도록 엄마 밥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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