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 그랬으면 어땠을까?

D+3349 첫째

by 바다별

마곡식물원에서 사온 씨앗을 심은 지 2주가 지났다.



둘째의 미모사는 싹을 3개나 올렸다.

여린 새싹이 하나 올라오나 싶더니 뒤이어 둘이나 더 세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느다란 새 줄기가 햇빛을 따라 뱅뱅 돌아가는 모습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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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라벤더는 묵묵부답이다.

발아에 필요한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알면서도,

첫째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옆 화분 새싹을 보면 더 조바심이 난다.

해가 잘 드는 창가로 화분을 옮겨가며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토요일 아침.

돌처럼 얼굴이 굳은 딸이 나를 부른다.


"아빠, 나 좀 도와줄래?"

상기된 볼, 물기 가득한 눈동자,

여느 때와 다른 차분한 목소리 탓에 불안이 엄습힌다.

딸을 따라가보니 책방 유리창 아래, 반쯤 쏟아진 화분이 보인다.

햇볕을 찾아 자리를 옮기다 실수 한 모양이다.


정말 큰 일을 겪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더니...

딸의 얼굴에는 땅거미같은 그늘이 내렸다.

"어떻하지? 괜찮을까?"

"너무 걱정하지마. 일단 정리부터 하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는 딸을 달래며 쏟아진 화분을 정리했다.

혹시 작은 뿌리라도 내렸을까 쏟아진 흙을 살살 골라보았지만,

아직 발아한 씨앗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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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정리가 끝나고,

딸은 그제야 감정이 복받치는지 꺽꺽 울기시작했다.

"내가 잘못해서 그랬어. 미안해."

괜찮다고, 며칠 더 기다려 보자며 딸을 달랬다.

하지만 잔뜩 쏟아진 흙과 한데 섞인 탓에

얼마나 깊이 묻혔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발아할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한참을 울던 딸이 묻는다.

"내가 쏟지 않았으면 잘 자랐을까?"

"원래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진 못해.

아직 뿌리내린 싹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씨앗이 약했을 수도 있고,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을 수도 있지.

쏟은 건 슬픈일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닐거야.

너무 자책할 필요없어. 다음부터 더 조심하면 돼."


조용히 듣고있던 딸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식물도감을 써야겠어.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더 잘 알면, 더 잘 키울 수 있잖아."

그리곤 혼자서 방에 틀어 박힌다.

한참동안 혼자서 완성한 식물도감.

인터넷을 검색하며 나름 정리를 해놨다.

라벤더도, 안개꽃도, 봉선화도 잘 공부해서 제대로 키워보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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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라벤더 싹이 안트면 어떻하지?"

"글쎄... 일주일 더 기다려보고... 버려야지."

"라벤더 싹이 안트면... 장례식도 해줄거야."

첫째가 다부진 표정으로 말한다.


라벤더 장례식이라니.

비록 싹을 틔워보진 못했지만,

환영받으며 왔다가 사랑받으며 가는 셈이다.


그래... 식물 장례식을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뜻대로 잘해보렴.

혹시 조문객을 받는다면, 아빠도 참석해서 마음으로 애도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