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묵집
전국이 사통팔달 교통망으로 연결되어 일일생활권이 된 지금도 영월은 단위면적당 도로 비율이 전국 229개 시 · 군 중 224위일만큼 낙후된 지역이다. 서울 기준 한반도의 씨줄인 영동고속도로와 날줄인 중앙고속도로를 절묘하게 비껴갔다. 지금보다도 더 교통 오지였던 이곳을 다녔던 옛사람들은 험준한 땅을 오가는 과정이 안녕하길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 땅을 영월(寧越 ; 편안할 영, 넘을 월)이라 불렀다.寧越
인근 도시인 태백은 1970년대 탄광으로, 정선은 2000년 들어 카지노 산업으로 영화를 누렸다지만, 내 기억에 영월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던 적이 없다. 다만, 38번 국도를 통해 접근성이 좋아지며 영월의 개발과 발전을 막았던 천혜의 험준한 자연환경이 관광 자원화되니 일거리 부족으로 노령화가 심각했던 <영월>은 Young Moon(젊은 달)로 재해석되며 점점 생동감 있게 젊어지고 있다.
영월은 멀리는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조선 6대 왕 단종의 유배지이자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역이 있는 곳이요, 가까이는 안성기 · 박중훈 주연의 영화 라디오스타의 주무대로 자연환경은 뛰어날지언정 음식의 재료를 조달하기엔 척박한 지역이다.
태백산맥 꼭대기 너머 서쪽에 자리 잡아 바다로부터 생선과 해산물의 조달이 어려운 데다 비탈 지형으로 쌀과 보리 등의 농사도 쉽지 않은 곳이다보니 영월은 대대로 산에서 나는 각종 나물과 버섯, 도토리 등을 채취하고 메밀과 콩, 감자, 수수와 옥수수 등을 재배하여 먹고 살았다.
메밀을 비롯한 밭작물은 쌀과 보리에 비해 찰기가 적어 그대로 밥을 해 먹기엔 적절하지 않아 영월, 정선, 평창 등 강원 영서지역에서는 밭작물로 만든 가공식품이 발달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올챙이국수, 도토리묵, 감자옹심이, 감자전, 메밀전병 등이 강원도의 향토음식인 연유가 여기 있다.
바위에서 술이 흘러나왔다는 전설이 어린 영월의 주천면에 가면 <주천묵집>이라는 삼십여 년 된 농가밥상 식당을 만날 수 있다. 이 집에서 경험한 음식은 도토리묵밥과 순두부, 감자전이다.
모든 음식이 훌륭했으나 가장 뛰어났던 음식은 의외로 감자전이다. 사실 감자를 갈아 기름에 튀기듯 구워낸 감자전에 특별한 비법이 있으랴마는 두툼한 두께와 바삭한 정도가 전국 어디에서도 미처 맛보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다. 더군다나 강원도 특유의 쿰쿰한 된장 발효 고추지를 얹어 먹으니 이런 별미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몽글하게 끓여낸 순두부도 그 고소함이 발군이었지만, 이 집의 도토리묵밥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맛으로만 따지자면 도토리 특유의 쌉싸레함이 느껴지는 강원도의 농가 음식인데 이 소박하면서도 투박한 음식에 담긴 정서가 참으로 정겹다.
마침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맛보았던 순흥묵밥이 문득 떠올랐는데 순흥묵밥은 이 집과 달리 김가루와 깨가루가 수북이 뿌려져 묵직한 유기그릇에 제공되는 형태로 영월 주천묵집의 서민적인 소박함보다는 상대적으로 양반가의 별식 느낌이 강하다.
영월의 묵밥을 접하며 영주 순흥의 묵밥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영월은 단종이 유배 중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한 곳이고, 영주 순흥은 단종의 복위 운동을 펼치려다 세조로부터 사사받은 금성대군(세조인 수양대군의 형제이자 단종의 숙부)이 위리안치되었던 동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였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