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이문설농탕>
한국인의 밥상은 국과 밥이 한 묶음으로 엮인 <탕반> 문화로 대표된다. 권세가들의 잔치 음식이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낸다지만, 서민들의 일상 밥상은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찬 밥을 뜨거울 국물로 토렴한 국밥에, 반찬이라 해봐야 간을 맞추는 간장과 깍두기가 전부였더랬다.
그 와중에도 지역별 특산품에 따라 탕반 문화는 다양한 음식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부산 · 경남 지역의 돼지국밥과 충주 · 영월 등 강을 끼고 있는 내륙 지역의 올갱이국, 바다로부터 모자반을 채취해서 끓이는 제주의 몸국, 바다와 합수하는 섬진강과 낙동강 유역의 재첩국 등이 바로 그 사례이다.
그렇다면 서울 고유의 탕반 문화라 하면 어떤 음식이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이 농경국가였던 조선의 왕이 선농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제물로 바쳐진 소를 잡아 끓여낸 탕국을 선농탕이라 불렀고, 이후 발음하기 쉬운 설렁탕이 되었기에 서울 고유의 대표적인 탕반 음식은 <설렁탕>이라 생각할 텐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청진해장국과 창성옥 등으로 대표되는 서울식 해장국의 근간이 소뼈를 베이스로 고아낸 육수이고, 권력계층이 거주했던 수도였기에 서울의 탕반은 소고기를 주재료로 끓여낸 설렁탕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어쨌거나 우금령(소의 도축을 금하는 왕실의 명령)까지 내려졌던 조선 시대에 임금이 주관하는 행사에서 소고기 탕국을 나눠주었다는 것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이해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대목은 대한제국 시절 개업했다고 알려진 이문설농탕은 1904년 개업했고, 이 식당의 상호는 선농탕과 설렁탕의 중간 단계인 <설농탕>으로 표기되어 있어 <선농제 기원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문한 음식은 <특설농탕>이다. 국밥집에서의 주문은 거의 '특'으로 주문하는데, 국밥 전문 식당에서 '특'은 '양 많이'가 아니라 <일반국밥보다 다양한 부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십을 목전에 둔 내가 이 집을 처음 방문했던 시점이 거의 20여 년 전 30대 초반 즈음이다. 당시 이 식당은 공평동 이층 한옥으로 영업을 했었고, 당시 나는 "왜 국물이 뜨겁질 않아? 김치는 왜 이리 짠 거야? 양에 비해 가격은 왜 비싼 거야?" 등등 온통 불만투성이었는데 나름 음식에 대한 여러 경험을 다시 쌓고 방문한 지금은 이쁜 구석만 잔뜩 보인다.
그간 미식 경험이 쌓여서인지 토렴식 국밥은 본디 뜨거울 수가 없는 형태였고, 심지어 과한 온도감은 오히려 맛을 느끼는 미뢰의 활동을 방해한다.
오로지 소뼈와 다양한 소고기 부위를 넣고 우직하게 끓여낸 국물은 당연히 심심할 수밖에 없는데, 첫 입에 짜다 느꼈던 김치는 국밥을 두어 술 뜨는 동안 국물과 간이 딱 맞아 들어간다.
여기에 불과 3천 원을 더 주고 특으로 주문한 덕분인지 담백한 양지와 쫄깃한 머리 고기, 여타 설렁탕집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지라(비장)까지 다양한 부위의 식감과 맛은 이래서 이 집을 대한민국 최고(最古)이자 제일 노포라 하는구나라는 감상에 젖게 한다.
#추가잡설
1904년 개업하여 120여 년 훌쩍 넘게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식당은 노포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을 험난하게 거친 대한민국에서 노포의 가치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 불과 십수 년 전부터이다.
노포에 대한 묵시적 동의는 있지만 사회적 합의가 없다 보니 노포의 기준을 상호로 할지, 혈연으로 할지, 식당 공간 자체로 봐야 할지에 대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
일례로 부산 밀면의 탄생 식당인 오십여 년 업력의 내호냉면은 창업주의 시어머니가 이북에서 운영했던 동춘면옥의 역사까지 물려받아 1백 년 역사를 인정받은 것이 불과 칠팔 년 전이고, 서촌의 취천루(現 차이치)는 1940년대 명동 롯데백화점 건너편 명동에서 영업했던 유서 깊은 만두집이 전신이지만, 혈연관계는 끊어졌고 취천루의 주방장이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문설농탕 역시 상호와 음식, 조리법은 역사를 거슬러 이어내려 져 왔지만, 위치도 여러 번 바뀐 데다 주인장도 3번에 걸쳐 변경된 것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