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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온천 여행과 장영실의 최후

장영실은 몽둥이 80대를 다 맞았을까?

by 정영현

1441년(세종 23) 4월 세종은 고질병 풍질(風疾)을 치료를 위해 이천(伊川) 온천에 행차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이천은 경기도 이천현(利川縣)이 아니라 강원도 이천현(伊川縣)으로, 한자가 다릅니다. 철원 북쪽에 위치하며 현재는 북한 영역인데, 당시 주로 임금님의 사냥터로 활용되던 고장이었습니다.


이천현의 위치

그런데 임금이 직접 행차하는 사업이니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천현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궁궐인 행궁(行宮)을 짓게 됩니다. 이 공사는 현지 주민뿐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의 스님 250명까지 노역에 동원하여 이루어졌고, 수시로 관리들을 보내 이를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또 온천까지 이르는 도로를 수리하고 다리(교량)를 확인하고 역마(驛馬)들을 미리 기르도록 했습니다. 이 무렵 황해도에는 전염병이 돌고 강원도에는 홍수로 인해 풍년이 들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왕의 온천 행차 준비는 이어집니다.




그러는 사이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1442년이 되었습니다. 3월 2일에 세종은 종묘에 향과 축문을 보내 선왕의 위패 앞에서 온천에 행차하겠다는 신고를 하도록 합니다.


3월 3일, 세종은 드디어 왕비와 왕세자(문종),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천으로 출발했습니다. 세종 일행은 중간에 이곳저곳에서 사냥도 해가며 천천히 이동하였습니다.


3월 7일, 이천(李蕆)이 사냥감 몰이를 하다가 화살로 병졸을 맞춥니다. 이천은 이 사건으로 이천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참고로 이천은 장영실과 함께 금속활자와 해시계, 혼천의 등 각종 도구를 만드는 일을 많이 했던 인물입니다.


이천온천에 도착한 것은 2주 정도가 지난 3월 16일이었습니다. 당시 강원도는 홍수로 흉년이 들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이 함경도에 성을 쌓는 일에 강원도 주민들을 동원하여 수고를 끼쳤으므로, 관청의 곡식을 풀어 구휼하도록 했습니다.


3월 16일, 행차 때 왕이 타고 있던 안여(安輿)가 부서집니다. 장영실,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가마 사건입니다. 책임자인 장영실 등 안여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의금부로 끌려갑니다.

이때 장영실이 제작한 '안여'라는 물건은 대체로 '임금이 타는 가마'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바퀴 달린 수레'로 보는 해석도 있는데, 3월 19일 기록을 보면 '메고 갈 인부(擔夫)'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로 보아 사람이 들어서 나르는 가마라고 보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가교. 안여 역시 대략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3월 21일, 온천신에게 제사를 올린 후 임금이 목욕을 시작하였습니다. 임금이 목욕을 할 때마다 행궁 밖에서 풍악을 울렸습니다.


4월 1일, 이번에는 온천 행궁에 지붕 처마나 무너져 사람이 다칠 뻔한 일이 발생하여 공사 책임자 박강·이순로·이하 등이 체포됩니다. 사헌부에서는 이들을 불경죄로 다스리라고 합니다. 왕은 대답 대신 장영실 건이 마무리되면 함께 처리하도록 합니다. 참고로 박강은 신기전(神機箭) 개발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4월 16일, 드디어 세종이 온천을 마치고 출발합니다. 이날, 온천 욕실에 화재가 발생합니다. 이틀 후 불을 냈다는 이유로 최득림 등 이천현 백성 네 사람이 체포당해 의금부로 끌려갑니다. 최득림 등은 몽둥이로 90대를 맞고 2년간 관청의 횃불을 관리하는 벌을 받습니다.


4월 22일 드디어 세종은 한양에 도착하지만, 궁궐 내에 전염병이 번져서 임시로 금성대군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왕과 왕세자가 경복궁으로 돌아온 것은 5월 1일의 일입니다.




이제 장영실이 받은 죄와 벌에 대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이 한양에 도착하고, 행궁을 부실공사한 박강·안여를 부실하게 만든 장영실 등에 대한 처벌이 논의됩니다.


4월 23일 행궁을 부실공사한 박강은 공신의 자손이므로 다른 처벌 없이 파면하고, 이순로·이하는 벌금을 내어 몽둥이 90대를 맞는 것을 면하고 관직에서 내쫓기는 벌을 받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벌이 너무 가볍다고 반발합니다.


4월 27일 의금부에서 안여를 부실하게 만든 죄로 책임자 장영실에게 몽둥이 1백 대, 철제 부속을 만든 임효돈·최효남과 안여가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 조순생에게 몽둥이 80대 형을 내릴 것을 요청합니다. 세종은 처벌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장영실은 형벌을 두 등급 낮추고, 임효돈과 최효남은 한 등급을 낮추고, 조순생은 처벌하지 말라고 합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법치국가였는데, 조선시대 핵심 형법은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국대전』은 대명률의 보조 법전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경국대전』 내용 중에는 그저 "대명률에 의거한다"라고 되어 있는 조항이 상당수일 정도입니다. 게다가 『경국대전』은 세종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성종 때가 되어서야 반포되었지요. 그러므로 세종 시기 조선의 형벌은 일단 『대명률』에 의거하되, 어느 정도 정상을 참작해서 처벌을 가감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대명률』에 명시된 형벌 중에 몽둥이로 때리는 장형(杖刑)이 있습니다. 장형은 그 등급에 따라 몽둥이를 100대부터 90대, 80대, 70대, 60대를 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장영실은 처음 장형으로 100대를 구형받았다가 세종이 2등급을 낮추었다고 하니, 80대 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장영실은 몽둥이 80대를 다 맞았을까요?


조선 후기의 곤장형

『대명률』에는 장형에 대해 '속(贖)'이라고 하여 몽둥이 맞는 것을 벌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조항이 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벌금의 액수도 명나라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수속((收贖)'이나 '속장(贖杖)'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많은 수의 관리들이 태만했다고 하여 장형에 처해졌다가 벌금을 내고 몽둥이를 맞는 것을 모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내용 중에도 박강과 함께 붙잡힌 이순로·이하 두 사람은 벌금을 내고 몽둥이 90대 맞는 것을 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장영실도 사실은 벌금을 내고 몽둥이는 안 맞은 게 아닐까요? 세종대왕이라면 장영실이 몽둥이를 맞지 않도록 편의를 봐주지 않았을까요? 희망을 가지고 이어지는 기록을 봅시다.


5월 3일, 세종이 황희에게 신료들과 함께 이천행궁을 부실시공한 박강 등과 안여를 부실제작한 장영실 등의 죄목을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임금이 황희에게 박강·이순로·이하·장영실·임효돈·최효남의 죄를 가지고 의논하게 하였다. 모두가 "이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몽둥이질을 집행하고, 그 나머지도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24년(1442) 5월 3일


보시다시피, 장영실 등은 '불경'이라는 죄목을 선고받았습니다. 단순한 근무태만이 아니라 불경죄로 처리하겠다는 것은, 이들이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뜻입니다. 왜냐 하면 불경죄는 '십악(十惡)'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십악'이란 유교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10가지 대죄를 가리키는 것인데,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이 그것입니다. 이중 '(대)불경'에 대해 알아보면, 『경국대전주해』에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불경: 임금이 주관하는 제사에서 신에게 바친 물건이나 임금이 입거나 쓰는 물건을 훔치는 것, 임금의 도장을 훔치거나 위조하는 것, 임금이 먹을 약을 조제하면서 본래의 처방대로 하지 않거나 착각하는 것, 수라상을 차리면서 『식경(食經)』에 기재된 금기를 범하는 것, 임금이 타는 배를 견고하게 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대불경'은 이와 같이 임금을 모독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나열된 사례 중 제일 마지막 '임금이 타는 배를 견고하게 하지 않는 것'에 장영실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십악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사람은, 몽둥이를 맞는 형벌을 받을 때 벌금으로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시기는 『경국대전』이 나오기 이전이지만, 아마 같은 형태로 처벌이 이루어졌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장영실은 십악 중 하나인 불경죄에 연루되어 꼼짝없이 80대를 다 맞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료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한 사안이므로, 세종이 임의로 죄를 덮어주거나 신변을 빼돌렸다거나 하는 것은 음모론에 불과합니다.(앞서 벌금으로 몽둥이를 면했던 이순로·이하 역시 불경죄로 처리되면서 도로 몽둥이 90대를 맞게 되었을 겁니다)


『경국대전』




이와 같이 1441년부터 추진되어 1442년에 이루어진 세종의 이천온천 행차는 욕실 딸린 행궁을 조성해야 하고, 길을 닦고, 수많은 신료들이 수행하여 사냥대회를 벌이는 대사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 온천 행차에서는 장영실과 박강이 처벌을 받았고, 이천 역시 중간에 귀환을 당하는 등 조선 초 기술 방면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풍질 증상은 낫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이듬해인 1443년(세종 25)에 다시 충청도 온양 온천으로 행차합니다. 물론 이때도 행궁을 조성하는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바로 온양행궁입니다. 이때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25칸 규모로 지어집니다. 그리고 임금이 행차하지 않을 때 관료들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탕을 따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온양행궁의 영괴대

온양행궁은 이후 왕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황폐화되고, 한참 후 현종 때인 1662년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그 규모가 원래의 4배인 100칸으로 확대됩니다. 정조 때인 1795년에는 이곳에 사도세자가 심은 세 그루 나무가 있다 하여 '영괴대(靈槐臺)'라는 공간을 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온양행궁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받고 사라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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