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이긴 하나 도무지 작품에 깊이와 의미가 없다는 혹평을 받은 앤디 워홀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훔칠 수 있는 모든 것이 예술이다.’
여기에서 ‘훔치다’란 단어는 물리적이고 감상적이자 정신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동사다. 나는 현실에 질량으로 존재하는 대상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생각, 의견 같은 사상적 표상 또한 훔칠 수 있다. 훔치는 행위로 인해 내 소유가 될 수 있는 물건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경우에 속하는 것까지도 얼마든지 훔쳐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산 정상에 올라 깎아지른 풍경을 눈으로 훔치기도 하고, 구수한 커피 향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귀로 훔치기도 한다. 눈을 감고 검은 무대를 불러내 상상의 시나리오로 만든 연극 한 편을 머릿속에서 상영하는 것도 어쩌면, 현실에 찌든 자아를 잠시 훔쳐내는 행위일지 모른다.
나는 오늘, 온 방을 훤히 비추는 아침 태양에게 잠을 빼앗겼고, 그로 인해 유한한 인생에서 새로운 하루를 훔쳐 내 어제와 비슷한 모양새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출근 후 직장 상사가 요구한 잡다하고 무가치한 페이퍼 워크가 훔친 하루의 삼 할을 다시 훔쳐갔고, 그 대가로 사장의 커다란 주머니에서 내 일급에 해당하는 쌈짓돈을 뜯어냈다. 적게는 하루에 12시간, 많게는 14시간까지 일하는 나를 감감이 묵인하던 사회는 자유, 여유, 재충전, 휴식, 휴가 따위의 안녕을 비롯하여, 체제적 불의에 항거한 나에게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와 좋은 평판, 승진의 기회마저 앗아갔다. 반면에 나는 계란 앞의 바위 같은 관행이란 시스템 속에 안일히 칩거 중인 관리자로부터 독종, 또라이와 같은 별칭을 얻어냈다.
‘Possibility to steal or be stolen’의 측면에서 내 하루를 돌이켜 보면, 과연 예술,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객쩍은 무언가를 뺏고 빼앗기며 쓸데없이 치열하게 돌아가는 사이클 속에서, ‘번아웃 걸린 사회 부적응자’라는 자학성 타이틀을 제외한다면, 나의 오늘 중 어떤 순간이 감히 예술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