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크닉

중학생은 피크닉의 참맛을 아는 나이

by 시쓰는국어쌤

피크닉이 롱런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인의 입맛을 잘 맞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믹스커피가 어른의 입맛을 사로잡는

적당한 구수함과

적당한 쌉쌀함과

적당한 단맛을 지녔다면


피크닉은

너무 달지 않은 적당한 달콤함과

적당한 과일향을 지녔다.

물이 아니면서도, 적당히

죄책감 느껴지지 않는 그런 달콤함.

시원하게 마셔도, 얼려 먹어도 좋고

미지근하게 마셔도 아쉽긴 하지만 나쁘진 않다.


중학생 시절은

피크닉의 맛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나이가 아닐까?



#. 300원이 줄 수 있는 최대의 행복


학교에서 물을 마시려면

물병에 챙겨 와야 했던

나의 중학생 시절


여름이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너무 목이 말랐지만

물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매점

300원짜리 포도맛 피크닉

냉장고에서 갓 꺼낸 서늘함이 손바닥 가득 느껴진다


비닐에 싸인 투명 빨대를 꺼내어

종이팩에 탁 꽂아 수혈하듯 빨아들였다.

열기로 가득한 내 혈관 곳곳으로 이동하며

당분을 전달하고 열기를 가라앉혀 준다.

말로는 도저히 다 형용할 수 없는 시원함.

300원이 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꼽자면

그때의 순간을 꼽을 것이다


적당한 가격과

시원함이 있었고

적당히 달큰한 포도향이 있었고

청량함마저 감돌았다

짧은 시간 피크닉을 다녀온것 같은

최대의 기분전환이랄까



#. 몰래 먹는 피크닉


처음으로 중학생을 가르쳤던 십여년 전,

방과후 수업 간식으로 피크닉과 빵을 제공했다

빵은 매일마다 수업이 끝날 무렵 파리*게트에서 배달이 왔다

음료수는 피크닉을 대량 구입해 놓고

빵과 함께 하나씩 나눠 주었다.


"간식은 꼭 사물함에 보관하시고 자물쇠로 잠가 놓으세요."

연구부장님의 신신당부였다.


그러나 매일마다 자물쇠로 열고 닫고 하는 것이 귀찮았던 나는

'설마 아이들이 훔쳐가기라도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내 자리 옆쪽에 피크닉을 쌓아 놓았다.

24개짜리를 5층정도로 쌓아 놓으니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방과후 수업을 정기적으로 듣는 아이들은

피크닉을 몰래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 2학년 OO누나랑 친구들이 교실에 갑자기 들어와서 피크닉 훔쳐 갔어요. 네개나요."

다급히 달려와 숨이 턱끝까지 찬 채로 이야기하는, 방과후 수업 최고의 성실왕 문규였다.


"피크닉을 가져 갔다고? OO이는 방과후 수업 듣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고?"


"몰라요. 저희 1학년 애들 앉아 있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각자 두개씩 가져갔어요. 저희가 안된다고 했는데 듣지도 않고 가져갔어요."


피크닉이 있는 곳으로 가서 확인해보니 정말 네 개가 비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OO이는 딱 한번, 지각이 누적되어 방과후 교실 청소를 했던 2학년 아이였다.

OO이를 불러 물어보았다.

당시 나는 2년차도 안된 병아리 교사였기에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저 혹시, 니가 여기서 피크닉 가져갔니?"


아이는 얼굴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두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거기 피크닉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래 그렇구나, 의심해서 미안해"


그러나 이 장면을 OO이 담임 선생님께서 보고 계셨다.


"OO이가 음료수를 가져갔나요?"


"저도 제보를 받고 그런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네요. 다른 아이가 가져갔나봐요."


담임 선생님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린 표정을 지으시고는


"제가 한번 불러다 말해 볼게요."


라고 하시며 돌아섰다.


'내가 괜히 일을 키우는게 아닌가..'


결국 내가 관리를 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닌데

괜한 사람들이 오해를 받고 고생을 하는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선생님, 얘가 가져간게 맞대요. 피크닉 네개 사서 선생님께 드리고, 사과하라고 했어요."


지저스!

그걸 어떻게 밝혀 내셨을까?


"정말요?"


"제가 붙잡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한게 맞다고 했어요."


그당시 경력 20년차 교사였던 그 선생님께서는 단번에 아이의 거짓말을 캐치하셨던 것이다.



"선생님 여기요, 죄송합니다.."


두손 가득 피크닉 네개를 들고 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OO이.

나는 차라리 훔쳐간 아이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지금 마주했더라면 엄하면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을텐데

당시의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 그래. 고마워.."


그리고 몇분의 정적이 이어졌다.

나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안도감, 무력감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 장면을 잘 마무리해야 할까’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이는 무엇이든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5월, 적당히 따스한 햇볕 아래

정적만 이어지고 있었다.


"저기.. 피크닉 얼마 안하잖아. 그런것 때문에 거짓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이는 그 말을 바로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더이상은, 참말로 더이상은 지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이 너무 불편해서 머리가 하얘진것 같다.


"그래, 그러면 가 봐."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방과후 교실로 돌아와 사물함을 열고

낑낑거리며 피크닉들을 날랐다.

차곡차곡 정리한 후에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


'서로 믿고 속이지 않으면 이런 자물쇠가 필요 없을텐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배우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니까.

이런 것들 하나하나 배우면서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곳이 '학교'니까


아이는 무엇을 배웠을까?

부끄러웠을 그 순간을 통해, 무엇 하나 마음에 남았기를.

그리고 그 일이 너무 오래 마음에 머물지 않기를.

피크닉 네 개가, 그 아이의 삶 어디가에서 작은 보호막처럼 남아

언젠가 어떤 선택 앞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었기를.


그렇게 피크닉은 한여름의 갈증을 달래주고,

어떤 아이의 실수도 품어주었으며,

지금도 누군가의 어린 시절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피크닉은 단순한 음료 이상의 무언가로, 우리 곁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다.


롱런하는 피크닉처럼,

적당한 자신만의 균형점을 잡아가며

상황은 바뀌더라도 나만의 균형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기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책가방 안에,
꽁꽁 잠긴 사물함 안에,
기억 한켠에 조용히 놓여 있을지도 모를 피크닉처럼.

오늘도 우리 곁엔
조용히 오래가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자—
오늘도 피크닉!



p.s. 요즘은 가끔 이런 음료도 마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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