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의 마침표
고집보다 덜한, 고민보다 더한 정도의 강성을 가진 생각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이 본인만의 성격이 더해진 상태로 하나씩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런 생각은 '사람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다르다는 것'. 매번 결정하는 상황이 다르고 이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며, 이 달라짐으로 인해 완전히 같은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기둥이 되는, 물론 이 기둥도 달라질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는 큰 기둥의 생각이 있다. 나의 기둥은 '시골에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다. 조용한 시골에서 강아지 몇 마리, 길고양이 몇 마리와 같이 지내면 참 좋겠다는 생각. 근사한 목조 가옥이 아니더라도 정원이 있는 작은 집. 아침에는 새소리에 일어나 마당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고, 저녁에는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소주 한 잔.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식탁을 차리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공간을 원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큰 기둥 생각을 꽤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의 도로 풍경은 대부분 농촌이다. 갈색 밭 위로 간간히 흰색 눈이 쌓인, 소똥 냄새가 날 거 같은, 그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붉은 기와지붕 농가들. 도심에 몰린 사람들이 이 땅에 골고루 정착을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품고 있는 사회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물 하나 없는 시골길이 보인다. '이렇게 크고 넓은 땅이 펼쳐져 있는데 내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땅이 없겠네' 등의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다 갑자기 서천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고향, 몇 년 전만 해도 명절마다 갔었던 시골집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시골집을 가지 않았다. 마침 서해안고속도로 위에 있겠다, 집에 가는 길에 들리고 싶었다.
할머니 집은 바다가 보이는 서천 동네는 아니다. 서천 내륙이라고 해야 하나? 국도를 달리다 보면 보이는 시골집 풍경과 비슷한 동네다. 높고 낮은 구릉들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 담장 대신 돌을 쌓아 만든 돌담길, 그 너머로 보이는 비닐하우스와 좁은 텃밭들. 거주하시는 분은 얼마 없으며 젊은 사람도 없다. 대부분이 70~80대 노인들뿐. 길에 나와 앉아계신 할머니들과 마당에서 호미질 하는 할아버지들. 흔히 생각하는 그런 시골 동네다. 지금은 어느 가족도 시골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그 때의 할머니 집은 허물어졌다.
항상 누구랑 같이 왔던 시골을 혼자 온 건 처음이다. 어릴 적 또래 사촌들과 뛰어놀던 시골 동네를 그 시절 그 나이의 애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는 30대가 되어서 천천히 산책했다. 담력시험한다고 밤마다 뛰어다녔던 논두렁길, 개울가에서 징검다리 건너기 내기를 하던 자리, 동네 뒷산에 올라 보던 별빛 가득한 하늘. 뭐 특별한 감정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냥 공기 좋고 날도 좋아 기분이 좋았다. 도시의 매연과 소음에 익숙해진 내게 이 고요함과 맑은 공기는 어쩌면 가장 큰 선물이었다.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함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길을 따라 걸으며 추석 즈음에 홍시 땄던 나무를 보았다. 그때 꼬마였던 내가 높은 곳의 감을 따려고 막대기를 던지던 나무는 이제 더 크고 굵어져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 설렁설렁 산책했다. 어르신을 보면 인사를 하려 했지만, 다들 어디 가셨는지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예전엔 골목 어딜 가나 누군가와 마주치곤 했는데, 이젠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동네가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안녕하세요. 혹시, ooo씨 아시나요?"
"이~ 알지"
"그 분, 막내 아들이에요"
"어이고 말 안하면 누군지 모르겠어"
라는 인삿말로 슈퍼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산소에 들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 했다.
혼자 찾아오기도 했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런가 할머니에게 속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화곡동 빌라촌을 벗어나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소리, 들풀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 이웃집 벽 너머가 아닌, 탁 트인 하늘과 산, 들판을 바라보며 사는 삶. 사무실 대신 나무 그늘 아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컴퓨터 화면 대신 밭의 작물을 들여다보는 시간들. 할머니와의 무언의 대화 속에서 잠시나마 도시의 분주함을 잊고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공기가 좋고, 날도 좋아 기분이 좋았다'는 이 소박한 행복이 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시골에서 찾고 싶었던 진짜 감정이 아니었을까. 3주간의 여행이 끝났다. 특별한 깨달음은 없지만 시골 구석에서 느낀 평범한 고요함이 위로가 됐다. 복잡한 감정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단순한 평온함이 좋았다. 매일 볼 풍경이야 달라지겠지만, 결국 내가 갈 곳은 이런 곳이 아닐까. 별 탈 없이 여행을 잘 마무리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