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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May 19. 2016

잡식

<채식주의자>의 수상을 바라보며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탔다. 출간한 뒤 십 년이 다 돼가는 <채식주의자>로 상을 받았다. 나는 아직 <채식주의자>를 읽어보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가 상을 탄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녀의 작품을 영미권 사람들에게 읽히게 해 준 좋은 번역가도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었다. 

언론에서는 기사를 쏟아져냈다. ‘한강’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강의 기적’이라는 문구밖에 모를 것 같은 유수의 언론들이 수상을 한 그녀를 연일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나온 단어가 ‘K문학’이었다. k-pop과 k-drama를 잇는 새로운 트렌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가 찼다. 사실 우리나라 작가가 해외에서 상을 받은 일은 이례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어쨌든 문학적으로 변방(?)이었던 한국에서 해외의 독자나 평론가에게 <채식주의자>가 좋은 중편소설로 선정됐다는 말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k문학이 대두했대더니, 이제 한국 문학이 본격적으로 세계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는 헛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인문학이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학에서의 한 과科, 나아가 졸업장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전락해버리고, 아예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성인 일 년 독서량이 0.8권 밖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한국’의 문학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관점에서 <채식주의자>는 ‘한국’의 문학이 아니라 ‘한강’의 문학이다. 


우리나라의 문학계는 이상한 구조로 되어있다. 평론가들은 매년 ○○소설상, ○○문학상 그리고 ○○일보 신춘문예 같은 타이틀을 걸어놓고 작가들을 평가하고 등단시킨다. 이른바 ‘순수문학’의 범주가 그렇다. 그들은 ‘순수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며 인간의 깊은 내면과 성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순수문학’이 읽히는 비율은 처참하다. 인문학이 죽으니, 순수문학은 ‘재미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토록 그들이 떠받치고 숭배하는 ‘순수문학’의 기저-이자 자본-는 무더기로 찍혀 나오는 자기계발서와 양판소,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책을 판매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애초에 ‘순수문학’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순간, 전체 문학에 ‘등급’을 매기며 “이건 고급이고, 이건 저급이다.”라는 인장을 찍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순수문학’을 비호하는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대중들은 그들의 이런 생각을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다. 


그러니깐, 지금 문학계에는 대중들이 진짜로 즐기는 문학과 소수의 평론가와 문학 전공자가 읽어야 ‘만’하는 문학사이의 ‘넘사벽’이 존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보기에 <채식주의자>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언론들의 말처럼 k문학이 세계로 나아가려면 외려 소수가 즐기는 소위 ‘순수문학’보다는 대다수의 인터넷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판타지 소설’들이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 그게 ‘정말로’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으니깐. 


내가 ‘순수문학’에 발을 들인 건 대학교 이학년쯤, 김영하의 소설을 접하고 난 뒤다. 마침 국문과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고 그 길로 많은 소설들을 탐독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나에게도 ‘순수문학’에 대한 환상이 생겨져 있었다. 그 성은 투명했고, 굳건해서 어지간하면 쓰러질 줄을 몰랐다. 글 쓰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후에는 나도 그것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대중들이 읽는 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나도 그 유리성에 속하고 싶어,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 내려갔다. 이 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춘문예와 출판사 문학상에 소설도 투고했다. 물론 떨어졌지만. 그리고 동아리에서 균열이 생겼다. 과연 우리가 ‘순수문학’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재미를 추구하는 ‘판타지’와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은 ‘좋은 문학’이 아닌가? 이 질문은 몇 달째 나를 뒤따라 다니고 있다. 아니, 내가 그것을 따라다니고 있다. 


지금까지 고민한 바, 나는 두 가지가 모두 공존하고 사람들에게도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나의 중도적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것 같다.) 재미있는 소설은 재미있는 영화처럼 정말로 금방금방 읽히고 웃음이 난다. 머릿속에서 돌고래가 춤추는 기분이다. 한 편, 진지한 영화나 성찰이 담긴 소설들은 읽고 나서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러고 나면 내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인문학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까지 인문학-심화된-을 배웠다면 당연히 교수나 그것을 발전시키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 인문학은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근데 그것이 대학교에 올라가서 문과대학이라는 간판 아래 국문, 중문, 일문, 독문이라는 것으로 갈래갈래 찢긴다. 상경대, 자연대, 공대를 비롯한 다른 학과들은 교양과목을 듣거나 일부러 타과의 전공수업을 듣지 않는 이상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힘들다. 오죽하면 공대생들은 ‘볼트와 너트만 안다.’라는 얘기가 나왔을까. 


전쟁 후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한국 사회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렸다. '한강의 기적'에 가려진 암세포들이 지금 그들의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재 이슈되고 있는 사회 문제는 너무나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난 본질적인 문제는 인문학이 삶으로부터 유리遊離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문학은 어렸을 적부터 배워야 할 덕목이다. 생각하는 동물로 태어난 이상, 생각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없어진 사회에는 배반과 부도덕 그리고 음해만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다. 재밌는 소설도 좋지만, 한번쯤 삶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생각해주는 ‘좋은 소설’, 좋은 ‘교양서적’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문학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수문학’이라고 칭해질 것이 아니라, 그들 안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예전부터 우리들은 한 가지가 있으면 그것을 두세 가지로 나뉘어 편 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곤, 하나를 정해 그 나머지를 배척한다. 유치한 행태다. 나도 요새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반성을 한다. 물론 쓰레기 같은 책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인문학을 제대로 사회의 양분으로 만든다면, 이제 문학은 하나로 합쳐지며 다양성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회도 좀 더 밝고 푸르른 쪽으로 서서히 변화되지 않을까. 그러니 편을 가르고 내 편이 아닌 것들을 배척하고, 한 작가의 중편 소설 하나가 해외에서 좋은 ‘상’을 받았다고 이제 K문학을 기를 때가 됐다니 뭐라니 하는 말은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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