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방
영화 <눈길>은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다. 본래 2015년 삼일절 2부작 특집 단막극으로 방영된 것을 영화판으로 재편집하여 2017년 3월 1일 개봉이 예정돼있다. 소녀상의 철거를 둘러싸고 도대체 외교부가 部인지 省인지 모를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나는 시사회에 선정된 덕분에 하루 일찍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주연 배우는 김새론(강영애役)과 김향기(최종분役)가 일제강점기 시대의 두 소녀 역을 맡았고, 현재의 종분은 김영옥 씨, 고등학생 역할은 조수향 씨가 분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켜가며 서사를 진행한다. 1944년의 배경에서 두 소녀가 어떻게 위안부에 끌려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2015년의 종분이 어떤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 두 개의 시간대는 인물들의 행동, 대사로 이어지며 교감한다. 때로는 할머니가 된 종분 앞에 소녀 영애가 나오며 극을 이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주목한 것은 ‘장치’였다. <눈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지화된 장치는 ‘눈길’과 ‘솜’이었다. ‘눈길’은 그토록 그리던 고향의 겨울 모습을 상징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끝없이 이어진 차디찬 길이다. 극 중에서 영애의 집은 솜이불을 만들었고, 2015년의 종분은 추운 겨울을 솜이불 밑에서 견뎌낸다. 목화나 눈은 ‘하양’이라는 색을 공유한다. 그리고 ‘하양’은 때 묻지 않은 두 소녀의 순수함을 표현한다.
일제의 잔인함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위안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따로 말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 ‘행위’를 보여주는 대신 ‘행위’ 후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방에 갇힌 소녀들에게 다가가는 일본군 병사들, 주기적으로 낙태를 위해 일부러 약을 먹이는 모습. 성병이 옮아 온몸 구석구석 종기가 난 소녀. 나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을 간접적 화법으로 느끼며, 제국주의 밑에서 자행된 참혹한 현실을 아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면 힘들다는 소리도 안 나온다.”
2015년의 종분이 옆집에 사는 여고생 은수에게 해준 말이다. 1944년의 위안부 시설에서 소녀들의 겉모습은 전과 차이가 없어 보이고 밝은 모습들을 보여주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고통과 감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1940년대의 시대상을 그렸기 때문에 가부장적 장치도 볼 수 있었다. 학교를 보내도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종분의 동생을 종분의 어머니는 ‘그래도 제사에 쓸 지방을 쓸 유일한 아들’이라고 말하며 종분에게 ‘동생 줄 감자를 대신 먹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현재(2015년)의 은수는 어떤가. 성인이 아닌 그녀가 ‘아재’와 술을 먹다가 경찰서에 간 장면. 그녀는 남자에게 ‘몸이나 팔 년’이라는 말을 들으며 유치장에 하루 동안 감금되지 않았는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일례 없이 도드라진 상황에서 위안부를 감히 바라본다면 ‘위안부’ 문제 역시 ‘여자’였기 때문에 당한 일이었다. 나는 지구의 역사에서 한 번도 ‘남자 위안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보다 여성의 지위가 더 낮았던 시절 그들은 일본군에게 ‘인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들은 이해하기는커녕, 그 시절을 살아보지도 못한 자들이 ‘협상’을 하고 ‘담판’을 짓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소녀들이 갇힌 작은 방을 보며 나는 내가 읽고 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났다. <자기만의 방>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들을 위해 강단에 서서 했던 말을 옮긴 책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상대적인 강자인 ‘남성’으로 살아오며 미처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책에서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도 바느질과 집안일을 하며 죽었을 ‘누이’를 상상하며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한 달에 ‘500파운드’가 필요하다는 강연을 했다.
<눈길>에서 소녀들이 갇힌 방은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소녀들이 있는 방은 전혀 ‘그들만의 방’이 아니었다. 그 방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사람들에 의해 잘못된 욕구를 해소하는 공간이었다. 1944년의 소녀들에게 필요했던 그들의 방은 온돌이 들어오고, 우리말로 쓰인 ‘소공녀’를 읽으며 목화솜이 가득 든 따뜻한 이불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2015년의 현실도 그와 같았다. 은수는 전기가 끊긴 반 지하방에서 산다. 은수의 방 역시 ‘자기만의 방’이라기 보단 삶을 영위하기 위해 족쇄처럼 채워진 ‘최소한의 감옥’이다. 그곳에는 따뜻한 기운이 필요했고, 종분이 극의 말미에 그 역할을 맡는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면, <눈길>은 위안부 이야기가 단순하게 ‘피해자 서사’로 끝나지 않은 점이 좋았다. 현실에서 종분이 은수를 위해 직접 나서고, 숨겨왔던 자신의 위안부 사실을 밝히며 투쟁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몇 해 전 개봉된 <귀향>이 혹평을 받은 것은 주제를 떠나서 영화적 장치와 서사를 푸는 방식이었다. 잘못된 ‘애국 마케팅’도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봐야 한다, 라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이런 무거운 주제일수록 조심이 다루어야 하고, 더 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눈길> 처음에 단막극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실한 촬영세트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런 영상물에 지원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은 영화의 아쉬운 점을 말하며 끝낼까 한다. 영애의 오빠와 종분의 애매한 애정관계는 개연성이 부족했다. 또한 영애와 종분이 위안부 시설을 두 차례 탈출하는 장면도 엉성했다. 대사가 없이 추운 겨울의 모습이 롱테이크로 나오는 장면이 많아 지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공을 넘어서 이어지는 두 아역배우와 김영옥, 조수향 씨의 감정연기는 좋았다. 덕분에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이런 시의성 있는 주제의 영화가 좀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완성도 있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