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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Oct 03. 2023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음력 10월 10일


어제 아침 중랑천을 따라 달리다 노원고로 빠져나와 단지 안 공원을 걷는 중이었다. 내가 걷는 길과 만나는 다른 길 너머로 작은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크지 않은 체구에 짙은 남색 계열의 작업복 같은 잠바와 비슷한 색의 천 바지. 지난 몇 년간은 떠올리지 않았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실루엣이 겹쳤다. 그 순간 당신의 무표정과 가끔 보이는 미소나 분개한 표정 같은 것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덩달아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고집스러운 모습도 함께 그려졌다. 가슴이 아렸다.


내 기억인지, 사진 속 모습이었는지, 어른들의 말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젊은 날의 당신들은 아버지와 함께 출근하시던 아침 현관 앞에서의 모습이었다. 나는 구미 금오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2층 주택에 살았는데-지금도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은 그곳에 살고 있다-, 아주 오래전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께 공장에 다니셨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항상 어머니와 동생과 나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셨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 엄하신 당신의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나 다리에서 강물로 떨어졌고, 그래서 평생 귀가 많이 어두운 채로 사셨다. 시골에서 거의 말씀 없이 묵묵히 농사일을 지으시다 첫째 부인과 결혼했으나 일찍 여의시고, 대가 센 우리 할머니와 혼인하셔 다섯 아이를 낳아 기르셨다. 할머니는 호탕하고 괄괄하셨고 또 돈을 잘 모으는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다고 하였다. 그 덕에 80년 대 초반 시내에 주택을 짓고 이사하였고, 몇 년 뒤에 그 집에서 첫 손주인 나를 가지셨다.


지금이야 아무도 안 믿겠지만-나도 잘 안 믿긴다- 어릴 때 나는 꽤나 귀엽고 애교가 넘쳐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쁨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에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함께 운영하던 식당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안아주려 뛰시다 투명한 유리문에 부딪혀 깨뜨리기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시장에서 매번 로봇 장난감을 사주셨다고 한다. 보조바퀴가 달린 비싼 어린이용 두 발 자전거도 사주셨다. 어린 나는 이선희의 ‘J에게’ 같은 노래를 잘 따라 불렀고 동요를 부를 때처럼 두 손을 맞잡고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항상 깊은 눈으로 묵묵히 계셨고, 할머니는 시집살이로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하셨다.


고난은 차례차례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 IMF로 아버지가 실직하고 할머니께서 치매를 앓기 시작하며 우리 집은 많이 힘겨워졌다. 집안일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일을 시작하셨고, 그즈음 할아버지는 집 근처 빈 땅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작은 밀짚모자를 쓰고 공장에서 입던 작업복과 바지를 입고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매일 논밭을 다니셨다. 때로 일손이 부족할 때 어린 나와 동생, 아버지, 어머니가 투입되어 잡초를 뜯거나 감자나 고구마를 캐거나 했던 기억이 있다. 일요일 오전에 잠옷 바람으로 밭일에 불려 나가 잠옷을 다 더럽힌 적도 있었다.


환갑을 넘으며 할머니의 치매 증상은 심해졌고, 아버지의 방황도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는 일을 하며 할머니를 돌보는 힘겨운 날들이 이어졌다. 둔하고 멍청한 사내아이였던 나는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에도 그 심각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밤에 할머니가 사라지셨다. 온 가족이 캄캄한 밤에 동네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는데, 밤이 아주 깊어서야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구미역 철로 근처에서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경찰이 발견했다고 한다.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할머니는 이제 걷는 법을 잊어버리셨다. 처음에는 매트에 누워 계셨는데, 나중에는 병원 침대를 하나 방에 들여 할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가끔은 아버지께서 돌보셨다. 욕창이 심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한쪽으로 누이고 반대쪽으로 누이고를 반복했다. 대소변을 치우고 몸을 닦고 죽을 먹이셨다. 할아버지는 논밭을 몇 군데 더 개척하셨다. 묵묵히 오래된 자전거를 타거나 끌고 농사를 지으셨다. 그즈음 나는 대학에 입학에 서울에서 지내며 가끔 고향에 내려왔다. 오랜만에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면 말씀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머니는 나를 거의 알아보지 못하셨다.


2005년 6월 나는 힘겹게 입대했다. 눈이 어두운 나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무거운 고난보다 나 자신의 가벼운 찌질함이 더 고통스러웠던 한심한 인간이었다. 10월 초 100일 휴가를 나와서도 할아버지에게 대충 인사를 드리고, 할머니는 돌볼 새 없이 나는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하얗게 센 머리가 거의 빠져있고 앙상한 팔다리만 남으신 할머니는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계셨다.


11월 11일 오전 일과 시간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던 중 군악대장이 나를 불렀다. 담배를 한 대 주며 고모부로부터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고 전해주었다. 마음이 무거워 담배를 몇 대 더 태우고 들어갔던 거 같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일과가 마무리되고 점호하기 얼마 전에 본부대장이 날 찾았다. 짐작이 갔다. 경례를 붙이고 대장실에 들어가니 본부대장과 군악대장이 함께 있었다. 무겁게 본부대장이 입을 연 순간, 나는 경례를 붙이고 나와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지 못하고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꺼이꺼이 울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점호 준비를 하던 생활관으로 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안동 터미널로 가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는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어 허탈하게 창밖을 바라봤던 것 같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10시 즈음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고모, 삼촌들은 삼배옷을 입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 영정사진을 보며 절을 하고 동생과 사촌동생들은 장례식장 식당에서 문상객들에게 밥과 반찬을 날랐다. 지친 할아버지는 먼저 집으로 가셨다. 어머니께서는 나보고 우선 집에 가서 쉬고 내일 다시 오라 하셨다. 집에 도착한 나는 마당에서 아래층 큰 방의 어두컴컴한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음력 10월 10일이었다.


무사히 전역을 하고 고향 집에 머물다 복학을 위해 다시 상경할 때에도 할아버지께서는 밀짚모자를 쓰고 농사를 지으러 다니셨다. 다만, 개간하신 땅 중에 일부는 개발이 되어 할아버지는 논밭을 꽤 잃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원래 시의 허락 없이 개간하는 것은 불법이었는데 특별히 단속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개발이 되면 소유권은 당연히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2010년 11월 나는 힘겹게 두 번째 임용고사 1차 시험의 결과발표를 기다리며 2차 논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월초에 할아버지 생신이 있는지라 저녁에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탔다. 아버지께서는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시험준비 해야 되는 놈이 뭔 시간 낭비냐, 오지 마라고 나를 혼내셨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무궁화호가 옥천역에 도착할 때쯤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려가는 중이라고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화가 난 나 역시 객실칸 사이에서 큰 소리로 아버지께 대들었다. 부자는 크게 다투고, 화가 난 나는 옥천역에 내렸다. 매표소에 문의하니 영동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다시 서울역에 내릴 수 있었다.


그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난 11월 15일, 2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서 아침으로 근처에 있는 한솥도시락에서 포장한 도시락과 편의점에서 산 왕뚜껑 컵라면을 늦은 아침으로 먹을 참이었다. 아버지께 연락이 왔다. 부자는 화해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당시 같은 고시원 맞은편 방에서 잠깐 살고 있던 친구 방의 문에 노크했다. 잠에서 깬 그에게 도시락과 컵라면을 주었다. 바로 기차표를 예매하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서 동생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즐거운 생신잔치를 마치고 며칠 후 찬 가을비가 오는 오후 할아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자전거를 끌고 집에 오셨다고 한다. 그 후 며칠 앓다가 갑자기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병원으로 옮겨지셨고 얼마 후 가족 전부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시험 준비를 하는 내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 한다. 담배를 피우던 동생은 어렵게 그 결정에 관해 말했다. 묵혔던 슬픔이 울컥했다. 힘겹게 할머니를 모셨던 어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와 같은 날 돌아가셨다. 모두들 호상(好喪)이라고 하였다. 음력 10월 10일이었다.


요즘 환갑을 넘기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넓어지는 이마, 깊어가는 주름, 왜소해지는 어깨와 팔다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시간의 세례 속에 약속된 휴식을 기다린다. 그게 내일일지, 아주 먼 미래일지는 모르지만.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첫 손주를 안겨주셨던 아버지, 어머니께서 당신들의 첫 손주인 내 딸을 보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기쁘고 뿌듯하기도 하지만 가끔 서글퍼진다. 그건 필히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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