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탄피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일요일 오전이다. 다들 종교활동을 위해 교회며 성당이며 절이며 떠나고 없었다. 몇몇은 축구공을 들고 연병장으로 갔다. 선선한 바람이 창으로 불어 들어온다. 좋은 날씨다. 그는 아침에 식당에서 가져온 우유와 관물대에서 꺼낸 보급용 건빵을 침상 바닥에 놓았다. 티브이 대 아래에 있는 수저통에서 포크 겸용 숟가락을 꺼냈다. 건빵 봉지 윗부분을 뜯어 작은 별사탕 봉지를 조심스레 꺼내고 한쪽 주먹으로 열린 부분을 꽉 잡았다. 남은 손을 주먹 쥐어 날 부분으로 봉지를 적당한 힘으로 때렸다. 건빵은 부서지되 봉지는 찢어지지 않도록. 꼼꼼히 건빵을 잘게 부순 그는 별사탕 봉지를 바닥에 놓고 숟가락의 뭉툭한 부분으로 역시 주의를 기울여 별사탕을 가루 내었다. 톡톡톡톡. 그러다 문뜩 하던 일을 멈추고 숟가락을 쥐지 않은 손을 펴 손바닥을 별사탕 봉지로 향했다. 잠시 후 침상 바닥에 누워있던 별사탕 봉지가 슬쩍 공중으로 떴다. 서서히 떠오른 봉지는 가뜩 힘을 준 부라린 그의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그는 손을 부들거렸고 어금니를 깨문 채 힘주고 있었다.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그러다 툭. 별사탕 봉지가 떨어졌다.
“휴우.”
심호흡을 한 그는 입구를 완전히 벌린 우유갑에 부서진 건빵을 조금씩 조금씩 부었고 이어 작은 봉지를 뜯어 가루가 된 별사탕도 부었다. 우유가 넘쳐흐르지 않게 몇 숟가락을 떠먹었다. 군대 밖에서 파는 시리얼 만하지는 않지만 군대에서도 우리는 답을 찾는다. 우유가 흡수되어 부드럽게 녹는 부분과 여전히 바삭한 부분의 식감은 콘프로스트 못지않다. 뒤섞인 별사탕 가루의 달콤함도 간혹 느껴진다. 맛있다. 맛없는 짬밥을 한 두 스푼 먹더라도 주말에 부지런히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이유는 건프로스트를 위해서였다. 아. 물론 마음대로 식사를 거를 수 있는 짬이 안 되는 일병 나부랭이인 것도 이유긴 했으리라.
그래도 꽤나 관대한(?) 군악대 1 생활관에서 그는 좋은 군번이었다. 군악대를 해체하네, 마네 소리가 나오고 한 동안 신병을 받지 않다가 그는 막둥이처럼 이곳에 던져졌다. 맞선임과는 7개월이나 차이가 났다. 이제 일병 3호봉이지만 6~7개월 뒤, 즉 상병이 꺾일 무렵이면 군악대 왕고가 된다. 대신, 신병 때 상당히 시달렸다. 그를 마킹했던 채현주 병장(9개월 선임이며 베이스 파트로 튜바와 수자폰을 불었다, 현재는 군악대 실세다)은 농담으로 하루 8시간을 갈궜다 말했다. 2시간은 가르치며, 2시간은 실수에 대해, 4시간은 그냥. 힘들었다. 그래도 미운 정이 쌓였는지 지금은 상당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건프로스트를 두 숟가락 째 떠 입에 넣는 순간 생활관 스피커에서 음질 나쁜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 아. 당직실에서 전합니다. 일에서 오 생활관 작업 인원 일 명씩 즉시 당직실 앞으로 집합하기 바랍니다.]
주말 당직사관인 보급관의 짜증 썩인 목소리였다. 평일 근무와는 다르게 아침부터 서야 하는 주말 당직이 엿같은 건 간부나 사병이나 매 한 가지였다.
“어우 씨. 주말에 뭔 놈의 꼬장을 부리려고 부르는 거냐. 안가 씨발."
아무도 없는 생활관은 무서울 게 없다. 아직 일병 찌끄레기이며 심지어 ‘일’ 병이지만 그는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1 생활관에 사람이 많았다 하더라도 아마 차출되는 이는 그일 것이다. 아니. 그가 자원해야만 했다. 그게 사병들 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러나 건프로스트는? 내 여유로운 주말 오전은? 그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머리를 굴리며 건프로스트를 한 숟가락 씹고 있는데 복도에서부터 쩌렁쩌렁한 보급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야! 너네 방송 들었어 안 들었어? 왜 안 나와? 어제 야근한 게 자랑이냐? 빨리 한 놈 나와!"
어느 누가 주말에 나가 작업을 하고 싶을까? 마음은 매 한 가지다. 생활관 별로 누군가 느릿느릿 기어 나오거나 아예 아무도 나오지 않기도 한 듯하다. 시커먼 곰보 얼굴의 보급관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각 생활관을 돌며 작업 인원을 보내지 않는 소대를 갈구는 중이었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귀 옆에서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이제는 같은 군악대원들이 머무르는 2 생활관에 진상짓을 하는지 가까이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보급관의 짜증이 들려왔다. 하아.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보급관이 2 생활관에서 지랄을 떨고 1 생활관의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티브이는 꺼져있었다. 티브이 대 양 옆 창문은 살짝 열려 있어 얇은 커튼이 조용히 나부끼고 있었다. 한쪽 침상 위에는 주둥이가 크게 열린 우유갑과 꽂혀있는 숟가락, 그 안에 희고 갈색의 내용물이 있었다. 바스락. 우유갑 옆에는 국방색의 건빵 봉지가 역시 주둥이를 연 채 바람에 바스락 거리고 있었다. 검은 얼굴보다 더 검은 전투화를 신은 보급관은 천천히 두 걸음 정도 생활관 안으로 들어왔다. 뚜벅뚜벅. 철컥철컥. 빈 엑스반도의 쇠로 된 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미묘한 위화감이 들었으나 아무도 없는 걸 뭐. 1 생활관은 종교활동에 관심이 많구먼. 아님 다들 체육활동 하러 갔나. 그는 뒤돌아 생활관을 나가 문을 닫았다. 찰칵.
그 순간 티브이 대 앞에서 그가 나타났다. 특별한 효과음은 없었지만 '슉'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디에서 빠르게 온 게 아니라 애초에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인비저빌리티.' 그는 자신의 몸과 몸에 접촉한 일정 부분을 투명화하는 마법을 얼마 없는 마력을 짜내어 시전 하였다. 다만, 맨발로 마법을 시전 하면 그의 발바닥에 접촉한 바닥 일부도 투명해지기 때문에 실내화나 운동화는 필히 신어야 한다. 또한, 대략 1분 정도밖에 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없으며 마법을 쓰는 동안 안구는 빛을 흡수하지 못하니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래도 쓸 가치는 있었다. 그는 조용히 침상에 걸터앉아 아주 흡족하게 건프로스트를 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