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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Oct 31. 2023

2. 사악한 원숭이와 함께 한 야간 위병 근무 (1)

[단편소설] 탄피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아. 라일종 씹새끼랑? 짜증 나네.'


그날 오후 야간 근무표를 확인한 그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가 속한 군악대는 본부근무대 소속으로 실내 불침번을 안 하는 대신 같은 부대에 속한 경비소대의 야간 위병소 근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근무표에서 가장 피곤한 2시부터 4시까지 순번에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게다가 사수는 2 생활관의 테너 색소폰을 부는 라일종 상병이었다. 라일종 상병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원숭이다. 외모도 성격도 모두. 물론 라일종 상병 앞에서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지만 군악대원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길고 얇은 팔다리에 짙은 갈색의 둥근 얼굴, 골초로 누렇게 뜬 흰자에 작고 매서운 눈동자, 툭 튀어나온 하관과 굵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힘이 좋고 탄력이 있어 운동을 잘하고, 입술이 두껍고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인지 악기도 잘 불었다. 그러나 입이 거칠고 시비를 잘 걸며, 야비하게 후임을 함정에 빠뜨리고 허우적대는 꼴을 즐기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병을 달고 갈굼의 세계에서 한 발 벗어난 그였지만 오늘 라일종이 또 어떤 꼬장으로 그를 괴롭힐지 벌써부터 머리 한쪽이 지끈거렸다.



새벽 1시 40분 즈음 불침번이 깨우자마자 그는 후다닥 환복을 하였다. 아직 새벽이 찬 3월이라 내복과 야상을 두껍게 껴 입어 몸이 무거웠다. 어우. 건조한 시기라 손가락에 손톱과 경계 부분의 살 여기저기가 쪽 갈라져 거친 전투복을 입고 전투화 끈을 맬 때 더없이 따끔거렸다. 생활관을 나와 어두컴컴한 복도를 조용히 그러나 후다닥 뛰었다. 야상 위로 맨 엑스반도와 탄띠는 덜그럭 덜그럭 불편한 소리를 내었다. 무거운 전투모의 턱끈도 거친 표면으로 턱을 간지럽혔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당직실 앞에는 이미 라일종 상병의 실루엣이 특유의 거북목 자세로 서 있었다. 어두워서인지 그를 돌아본 상병의 누런 두 눈만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야이 씨발아. 나보다 늦게 나와?"


어이구 무서워라.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용히 욕을 박았다. 웃기지도 않았지만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굽신거렸다. 그게 군대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후임의 모습이자 가장 빨리 꼬장을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일병 임재중. 죄송합니다. 다음엔 더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충성, 상병 라일종 외 일 명 당직실에 용무 있어서 왔습니다. 충성."


당직실에 들어간 라일종 상병은 당직사관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도 따라 들어왔다. 당직사관과 본부대 당직부사관, 화학대 당직부사관 셋이 영혼이 빠진 눈빛으로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탄창보관함에서 공포탄 탄창을 하나씩 꺼내 탄띠에 넣었다. '우상탄 스무 발 이상 무.' 총기함을 열쇠로 따고 오후에 미리 가져다 놓은 소총을 꺼내 오른쪽 어깨에 걸쳤다. 그는 라일종 상병 오른편에 차렷자세로 섰고 상병이 근무 신고를 하였다.


"충성, 상병 라일종 외 일 명 위병 근무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보급관은 잠이 덜 깬 피곤하고 퉁퉁 부운 표정으로 성의 없이 경례를 받았다. 근무자 둘이 뒤로 돌아 당직실을 나가는데, 보급관이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아아. 야. 맞다. 잠깐만. 잠깐만."


그와 상병이 다시 뒤돌아 섰다.


"오늘, 그, 뭐더라. 야간에 상급부대에서, 그, 거수자* 역할로 몰래 부대에 침투할 수도 있다고 하거든. 그거 뚫리면 좆 되는 거 알지? 혹시 모르니까 긴장하고, 졸지 말고 잘 봐봐."


라일종 상병이 대꾸했다.


"집으면 포상 줍니까?"


보급관은 으이그 하는 표정으로 씩 웃으며 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고생해라."


다시 당직실 입구에서 돌아서 경례를 붙이고 둘은 어두운 복도로 걸어갔다.


중앙 현관을 나온 그와 라 상병은 약 500미터 떨어진 위병소로 걸어갔다. 본부근무대 앞 작은 연병장을 빙 둘러 사령부를 지나 거대한 사단 연병장 동편을 따라 이어진 아스팔트 길을 계속 걸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만이 군데군데 도로를 둥글게 비췄고 왼쪽으로는 먼 산의 짙은 실루엣이 그보다 옅은 하늘을 따라 주욱 이어졌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내뿜는 하얀 입김이 뿌옇게 양쪽 뺨을 스쳐 흘러갔다. 그는 갈굴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라일종 상병의 걸음 속도에 맞췄다. 덜그럭 덜그럭. 오른팔 옆에 낀 소총과 탄창의 쇠가 부딪히는 소리. 문뜩 훈련 3주 차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올려다본 밤하늘이 떠올랐다. 얼마나 우울하고 억울했으면, 얼마나 여유가 없었으면 보름이 넘도록 하늘 한 번 보지 않았을까. 별이 가득한 밤하늘의 경이로움을 느낄 만큼 여유를 찾긴 했던 걸까. 반년을 넘게 지낸 군대는 여전히 그에게는 가까이할 수 없는 낯선 공간이었다.


위병소 안 사무실로 들어가 위병장교에게 근무교대 신고를 하고 소총에 공포탄이 스무 발 든 탄창을 장전한 후, 그는 라일종 상병과 정문 초소로 내려왔다. 전 근무자인 채현주 병장과 문성현 이병과 짧게 말을 주고받고 둘은 각자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위장막으로 둘러싸인 초소는 뒤쪽이 뚫린 형태로 앞에는 총을 거치할 수 있게 가슴 높이까지 벽돌로 쌓아 올린 난간이 있었다. 그는 구석 어딘가에 있는 비상스위치 페달을 신경 쓰며 조심스레 총구를 난간에 올렸다. 앞쪽으로 지그재그로 배치된 바리케이드의 격자 모양이 드문드문 비쳤다. 위병소 밖으로 정문은 약 30미터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정문을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 맞은편에는 큰 주유소가 밟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이라 간혹 자동차의 라이트가 빠르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지나갔다.


시계를 보니 2시 8분이었다. 아직 10분도 안 지난 거야. 추위가 야상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왔다 갔다라도 좀 할까 생각하다 그는 그만두었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반대편 초소의 라일종 상병은 조용했다. 그는 오늘의 암구호*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장발장/국수. 암구호는 매일 누가 정하는 걸까. 장발장은 촛대를 훔쳤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중에 반대편 초소에서 기척이 들렸다. 즈르르륵. 소총의 쇠가 벽을 긁는 소리. 라일종 상병이 나오려나 보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게 신중히 소총을 들고 초소 밖으로 천천히 나왔다. 5미터 정도 거리인 반대편 초소 옆에 라일종 상병의 검은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 거수자: '거동수상자'의 줄임말. 아직 범행이 확정되지 않으나 의심되는 수상한 인물을 뜻한다.
* 암구호: 군에서 야간 근무를 할 때 적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 경비를 서는 자와 출입하려는 자가 서로 확인하는 암호이다. 별 연관성 없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일매일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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