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탄피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화장실 제일 끝 칸 안이었다. 반짝이는 A급 전투화를 신은 그는 변기에 앉아 오른발 뒤꿈치를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오른손을 펴고 있었고 거기엔 반짝이는 황금색 탄피가 하나 놓여 있었다. 4 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탄피는 실탄이 아닌 공포탄이어서 탄환이 따로 없는 대신에 탄피의 몸통 윗부분이 길게 중앙으로 구부러져 모여 있었다. 끝부분엔 붉은 페인트가 작게 칠해져 있었다. 한 번도 발사되지 못한 새 탄환이다. 티 없이 둥근 탄피는 화장실 벽 창문으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부대에 계획된 공간이 아닌 곳에 허가되지 않은 자가 이렇게 탄피를 가지고 있는 일은 군법에 크게 어긋난다. 그게 공포탄 일지라도. 그는 긴장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눈 아래 희미하게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다. 조그마한, 그러나 몸통에 들어 찬 화약에 의해 크기보다 무게감이 더 느껴지는 물체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럽다니.
한 순간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일병 정기휴가 날 아침이었다. 최현주 병장, 우하경 일병과 함께 나가기로 하였다. 아마 터미널 앞 감자탕 집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헤어지지 않을까 싶다. 라일종 덕분에 9박 10일이던 정기휴가는 절반이 잘려 4박 5일이 되었다. 아니다. 정확히는 그의 인내심 부족한 심성이 빚은 결과였다. 아니다. 애초에 저 성깔 더러운 원숭이가 갈구지만 않았어도 소총을 발사하게는 하지 않았을 거다. 결국 다 그 원숭이 탓이다.
그가 라일종의 소총을 움직여 공포탄을 쏜 새벽이 지나고 전날의 일은 이른 아침 사령부 회의에 올라갔다. 숙취에 짜증이 오를 데로 오른 사단장의 철퇴를 맞기에 충분했다. 상급 부대의 작전에 긴장한 탓도 있었다는 본부근무대장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강한 처벌이 떨어졌다. 라일종 상병은 영창 5일, 함께 근무했던 임재중 일병은 휴가 축소를, 당시 위병장교와 조장은 군장 구보 조치를 받았다. 라일종은 생활관에서 질질 짜며 군악대장에게 호소했지만 상명하복의 사단 내에서 사단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날 그는 탄피를 두루마리 휴지로 둘둘 말아 관물대 속옷 서랍 깊숙이 처박아두고 불안에 떨었다. 행정반이나 돌아다니는 간부들, 주변 사병들에 신경을 곤두선 채 하루를 보냈지만 라일종이 공포탄을 쏜 이슈만이 부대 내에 떠돌았다. 근무용 탄창에서 좌상탄이 발견되었다거나 탄피를 잃어버렸다거나 하는, 그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만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라일종의 갈굼에 분노해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를 만큼 무모한 면도 있었지만, 사실 그는 겁 많고 소심했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남이 기분 상해 그에게 나쁜 말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기 싫어했다. 분노가 그의 눈을 가리지 않았다면, 라일종의 갈굼이 선을 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평소와 같이 순응하며 근무 시간을 인내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억울한 라일종이 그를 걸고넘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그를 걸고넘어졌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그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구는 타인에 신경 썼고 눈치를 챙기며 군생활을 했다. 어쨌든, 소심한 그는 그날 이후 소지한 탄피를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 해 하는 한편, 이 탄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해 왔다.
그의 우려는 납득이 되는 지점이 있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해 그의 관물대라던가, 군악대 연습실이나, 심지어 그의 몸이 수색당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 졸이며 보낸 첫날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언제까지고 탄피를 관물대에 둘 수는 없었다. 주변에 널린 숲이나 배수로, 하수구 등에 탄피를 던져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식사를 마친 직후, 야간 점호 전 분리수거 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침에 눈을 뜬 후부터 취침에 들 때까지 누군가의 시선을 벗어나 단독으로 행동할 기회도 없었다. 식사 후에도 충분히 멀리 움직일 여력이 없었고 분리수거는 항상 막내들 담당이었다.
야간에 인비져빌리티 마법을 사용해 당직실에 잠입할 생각도 해보았다. 이도 판타지 소설 속에서처럼 쉽지 않았다. 인간의 기척이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옛날 일본의 이조성에는 기척을 죽인 닌자들을 막을 보안 시스템인 꾀꼬리 마루(우구이스바리)란 보인 시스템이 있었다. 마룻바닥을 밟으면 새소리가 안 날 수 없도록 설계해 기척을 죽인 닌자의 침입을 알리는 시스템이었다. 소리는 인비져빌리티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물론 중세 시대의 대마법사들은 강력한 스펠로 소리까지 침묵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력이 강성했던 중세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숨소리, 옷이 쓸리는 소리, 침 삼키는 소리를 죽인 채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포기.
그 외에도 마법이나 다른 수단을 강구해 보았지만 딱히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탄피는 그의 관물대에 있다 건빵 주머니로 옮겨갔고 연습실 책상 서랍에도 갔다가 군장실의 장롱 속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자그마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불안감은 그의 얇은 정신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때로는 딴 데 정신이 팔려있다 대장의 지휘를 놓쳐 행사를 망치기도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선임에게 갈굼 세례도 당했다. 후임에게 별 것 아닌 일로 화풀이를 하기도 하고, 한 번은 본부대장과 마주쳤는데 행사복을 든 오른손으로 경례를 해 크게 한 소리를 들었다. 매일 저녁이 되면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다행히도 그가 휴가를 가는 당일 오전까지도 탄피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결심했다. 그는 탄피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부대 내에서 이 탄피를 소지하고 있다가는 정말 큰 사고를 쳐버릴 것 같았다. 떨고 있던 오른 뒤꿈치를 멈추고 변기에 물을 내리고 그는 화장실 변기 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채현주 병장의 오른편에 서서 그와 발맞춰 위병소로 걸어갔다. 그의 대각선 뒤에는 우하경 일병이 역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채병장은 사격 만발로 포상휴가를, 우일병은 악기 연주를 잘해 포상외박을 받았다. 셋은 출발 날짜를 맞춰 아침 회식을 하고 흩어지기로 하였다. 나머지 둘은 신나게 각자 포상휴가와 외박 때 무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위병소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오른쪽 전투화 발목 즈음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숨겨 둔 탄피가 자꾸 양말 위로 느껴졌고 신경이 쓰였다. 쇼생크 탈출에서 어느 누구도 앤디의 구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전투화도 위병장교와 조장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충승, 병장 채현주 외 2명 위병소에 용무 있어서 왔습니다. 충승.”
다분히 의도적인 경상도 사투리를 섞은 채현주 병장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휴가에 대한 기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위병장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휴가 신고를 받고 휴가와 외박 시 주의 사항을 기계적으로 읊었다.
“이상한 거 가지고 나가는 거 없지? 따로 몸수색은 안 한다. 잘 갔다 와. “
뜨끔. 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채현주 병장과 동기인 위병조장은 셋과 함께 위병소 옆 면회실을 지나 흡연구역으로 갔다. 그는 조급한 마음에 담배를 마시고 뱉는 간격이 짧아서 인지 남들보다 빨리 담배를 껐다. 왜 저리 느긋하게 피우고 있는 건가. 조바심이 났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위병소를 지나 지그재그 바리케이드를 넘었다. 탄피는 무사했다. 그러나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렇게 쉽게 가지고 나와도 되나. 이게 군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