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탄피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팅!‘
“19층입니다.”
스르르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척. 척. 스윽. 척. 비틀비틀 연녹색 바탕에 갈색, 황토색, 검은색 등이 픽셀처럼 점점이 박혀있는 전투복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군인은 현관문 앞 기둥에 오른팔을 걸치고 비틀거렸다. 현관문 도어록을 열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 삐비빅!’
어우. 손이 빗나갔다. 그는 다시 한번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이번에도 정확히 누르지 못했다. 몸이 뒤로 휘청이자 오른발을 뒤로 한걸음 디뎌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몸은 현관문 쪽으로 다시 기울었다. 도어록을 누르려던 왼손으로 문을 짚었지만 머리를 쿵. 베레모는 건빵 주머니에 구겨 넣어 맨 이마를 현관문에 부딪혔다.
'퉁!'
“어우씨.”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겨우 집중하여 천천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불규칙한 박자로 삑 삑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떨 땐 느리게 어떨 땐 빠르게.
'띠리리링! 위잉!'
도어록이 풀리고 그는 현관문을 열고 몸을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쿵! 위잉!'
무거운 문이 닫히며 공용현관과 계단에 미묘한 에코를 남겼다.
채현주 병장, 우하경 일병과 함께 위병소를 통과한 그는 곧바로 터미널 앞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시끄럽게 떠들며 돼지 등뼈를 뜯고 소주를 마셨다. 오랜만의 휴가여서였는지, 친구처럼 가까운 선후임과의 술자리여서였는지, 아니면 탄피를 성공적으로 가지고 나와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엿 같은 곳을 잠깐은 벗어날 수 있어서였는지, 마음이 평소보다 붕 떠있는 채로 그는 한 잔, 두 잔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주량이 세지 않았던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스에 올랐다. 너무 취한 덕이었던가.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죽은 듯 잠들어 있을 수 있었다. 끝없이 빙글빙글 도는 세상과 가누기 힘든 몸, 시시 때때로 역류하려는 위의 음식을 참아가며 겨우 터미널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왔다.
현관은 어두웠다. 고요함 속에서 째깍째깍 벽걸이용 시계 소리가 크게 그의 귀를 감쌌다. 그는 현관으로 연결된 중문을 드륵 열어 마루에 털썩 앉았다. 촘촘하게 묶인 전투화 끈을 풀려 노력했지만 끈 끝부분을 찾기 쉽지 않았다. 손가락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는 어지럽고 시야는 빙글빙글 돌았다. 아이 씨발. 벽에 몸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그가 신발을 벗기 위해 분투하던 중에 오른쪽 전투화 속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톡. 또르르르르르르.'
분명히 새벽에 스카치테이프로 발목 즈음에 붙여 놓았는데. 어둠 속에서 옅게 반짝이는 황금색 탄피였다. 그래도 집 안에서 떨어진 게 어디야. 그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오른손을 뻗어 저만치 멀리 굴러간 탄피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세운 무릎에 배가 눌렸다. 그는 그대로 아침에 먹은 고기와 술을 쏟아 내었다. 우억, 우어억. 고통스러운 역행의 순간이 지나자 전투복과 전투화, 현관은 그의 토사물로 가득 채워졌다. 다행히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 외의 피해는 없었다. 부모님께서 다른 신발은 신발장에 모두 올려놓으셨던 듯했다. 한참 동안 속에 있는 것을 비워 내자 머리와 목, 위에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걸 어쩌나. 괜찮아. 집에 아무도 없어, 당분간은. 입 안을 게워 내고 입술과 얼굴을 소매로 대충 닦았다. 전투화를 벗지 않은 채로 그는 현관으로 이어지는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잠들었다.
그의 부모님은 해외여행을 가고 없었다. 놓치기 힘든 패키지여행 상품이어서 그의 휴가 기간이었지만 부모님은 여행을 강행하셨다. 지난번 부대에 면회를 오신 이유가 아들에 대한 이 미안함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괘념치 않았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혼자 밥 정도는 차려먹을 수 있다. 한 가득한 현관의 토사물도 혼자 깔끔하게 치울 수 있는 군인이었다. 또한, 부대 내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집을 비워주신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날 저녁에 깨어난 그는 숙취에 허덕이는 몸을 이끌고 토사물을 치우고 전투복과 전투화를 세척하여 베란다에 말렸다. 냄새를 빼기 위해 밤늦게까지 거실과 베란다 문을 전부 열어 놓았다. 두 시간이 넘는 너무나 힘든 작업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에 오들오들 떨며 담요로 몸을 감싸고 어두컴컴한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갔다. 불을 켜고 제일 밑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이것저것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을 빼자 거기엔 황금색 탄피가 들려 있었다. 토가 묻어 시큼한 냄새가 날까. 그래도 이제 정말 마음 졸일 일은 없겠지.
제일 위쪽 서랍에 있던 스마트 폰을 꺼내 충전기에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입대하기 전에 그는 폰을 정지해 놓지 않았다. 지난 100일 휴가 때 잠깐 사용하고 지금까지 꺼져 있었다. 전원이 들어온 스마트폰 SNS에는 읽지 않은 문자나 메일이 주욱 떴다. 대부분 쓸데없는 광고 문자라던가 별 영양가 없는 인간들의 연락이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주영민 교수님.'
'잘 지내는가. 군 생활은 할만한가. 휴가 나오면 한번 봅시다.'
짧은 세 문장이었지만 그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는 현재 마법역사학과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 상태였다. 마법역사에 관한 소논문을 작성하는 일이 졸업 요건 중에 있는데, 이를 위해 4학년 1학기 중에 지도교수를 선택한다. 그는 10여 년 전에 중세 어느 시기 마력이 갑자기 소멸한 불가사의한 일, 일명 흔적삭제시기가설(trace-removal period hyphthesis)을 주장한 학자인 주영민 교수를 택했다. 교수가 주장한 이 가설은 다양한 근거를 들며 논증하는, 처음 주장을 한 뒤로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그 역시 그 가설에 매료되어 있었다.
지금은 마력이 사라진 황량한 시대이다. 아. ‘황량’하다는 묘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인류 문명은 유래 없는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중세시대의 마법으로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정보의 저장과 대량생산. 그게 가능한 시대였다. ‘황량’하다는 지점은 중세시대에 가득했던 마나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긴 힘들지만 학계는 대략 400년에서 1400년 정도의 10세기를 마력이 융성했던 중세시대로 명명하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15세기 무렵 마력이 사라지며 마력과 신, 전설적 몬스터를 숭배하던 종교의 위세가 쇠락하고 인간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마법과 주술에 크게 의존한 고려는 마력이 사라진 공백을 채우지 못하였고 800여 년의 위세는 단숨에 무너졌다. 다만 아직도 가끔은 미약한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 태어나고는 있다. 비록 아주아주 미력한 힘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 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희귀한 마력을 지닌 자 중 하나였다.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운명처럼 마법역사학과에 진학했다. 철학과나 고고학과처럼 취업도 잘 되지 않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학과였지만 지난 3년 반 동안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군대에 끌려가면서도 공부를 멈춘 것이 가장 아쉬웠던 그였다.
그는 책장에 꽂혀있는 전공서적을 몇 권 뒤적였다. [고려 후기 마법사(魔法史)]나 [위화도 회군: 마법사의 전술운용을 바탕으로] 같은 작은 글씨로 된 고리타분하고 두꺼운 책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고 때로는 깨알글씨로 쓴 그의 메모가 적혀 있기도 했다.
그가 전공서적을 탐닉하며 대학 시절을 회상하고 있을 때, 책상 위 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우우우우웅!’
054로 시작하는 일반 전화였다. 부대였다. 씨발.
“충성, 일병 임재중 입니다.“
“야. 군악대장인데. 너 내일 복귀해야 겠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내일 복귀하라고 인마! “
오늘 나왔는데 내일 복귀하라고? 휴간데? 9박 10일도 아니라 반이 날아가버린 4박 5일 휴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