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어디서 오셨습니까?

훈련소의 날시(詩): 24일 차

by 정오

훈련소의 날시(詩): 24일 차


26. 어디서 오셨습니까?


수류탄 사격장에 가는 길은 유난히도 멀었다. 실제로 수류탄 사격장은 막사로부터 5km 정도 떨어져 있어 총기 사격장보다 더 먼 곳에 있었다. 그러나 유난히 멀게 느껴진 이유는 거리보다도 등에 진 군장과 날씨 탓이 컸다. 구름은 없다고 하기엔 애매할 만큼만 하늘에 떠있는 맑은 날이었다. 강한 햇빛 탓에 눈이 부셔서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힘들었다. 주변이 온통 하늘뿐인 평평한 논밭길을 걸을 때에는 바닥만 바라보며 걸었다. 군장은 땀을 흡수해서 몸집을 불리기라도 하는 듯 걸을수록 무거워졌다. 나는 손목 환자로 분류되어 수류탄 사격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시범 교육은 참관해야 했다. 그래도 시범 교육 이후에는 먼저 쉴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망매지갈(望梅止渴)의 고사를 떠올리며 꿀 같을 휴식을 향해 걸었다.


도착해서 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훈련병들이 20명 정도 되었다. 나머지 훈련병들이 수류탄 사격을 하는 동안 우리는 초록색 반투명 지붕 아래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낡은 칠판이 하나 있고 계단식으로 놓인 좌석에 둘러앉도록 설계된 강당이었다. 훈련병들은 나란히 앉은 생활관 동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걸어온 길이 너무 힘들어 다리를 뻗고 쉬고 있는데 한 계단 아래에서 떠들면 무리 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는 정확히 뭘 묻는지 알 수 없어 출신 지역과 소속을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왔고 26 연대 3중대입니다. 옆에는 같은 생활관이고 강릉에서 왔습니다.” 내 대답이 대충 의도에 맞았던 듯 질문한 훈련병도 자기 소속을 말했다. “저희는 29 연대입니다. 대구에서 살다 왔습니다.” 훈련은 다른 연대와 함께 진행되는 하는 모양이었다. 훈련병은 많고 사격장은 한정적이니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실거리 사격 때도 다른 연대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났다.


훈련소에 입소하면 가장 먼저 대운동장에 모여 지역별로 인원을 분류한다. 지역별이라는 것은 현재 거주하는 지역이 아니라 입대를 신청한 병무청의 지역을 말한다. 서울에서 자취하며 대학을 다니고 있더라도 본 거주지가 지방으로 되어있다면 지방 병무청 소속으로 입대하는 식이다. 지역별로 나눈 후 연대를 나누는데 지역 분류와 거의 동일하게 배정된다. 예외는 한 지역 인원이 연대 할당 인원을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경우에 생긴다. 초과한 쪽이 미달한 쪽으로 가게 된다. 내가 있던 생활관이 그 예외로 구성된 생활관이었다. 원래라면 26 연대는 전라도 병무청을 통해 입대한 인원들이 오는 곳이었다. 한데 우리 생활관 인원들은 줄을 설 때 주춤주춤 한 것인지, 늦게 도착해서 뒤에 서있던 것인지, 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모인 생활관이 되었다. 나를 비롯해서 네 명 정도가 수도권 출신이었고 대구, 부산, 광주, 강릉, 대전 등 출신지가 다양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도 두 명이나 있었다.


어쩌다 수류탄 사격을 열외 했는지, 그쪽 중대 분위기는 어떤지 간단한 대화를 나누다가 처음 말을 걸었던 훈련병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26 연대는 전라도 쪽 아닙니까?”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우리 생활관이 구성된 예외적인 사연에 대해 설명했다. 아마 우리 생활관을 제외하고는 다 전라도 출신일 거라고 하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피상적인 이야기 외에는 주고받을 것이 없다 보니 대화 주제가 금방 떨어지기도 했고, 모두 피곤한 상태라 대화는 금방 끝났다. 나는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조교들이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끝날 거라고 했으니, 수류탄 사격이 끝나려면 아직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 웃음소리를 들으며 비몽사몽 하게 앉아 있으니 훈련병들 여럿이 걸어오는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을 10분 정도 앞두고 있었다. 예정보다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다들 고생할 때 그늘에 앉아있었으니 동기들에게 뭔가 미안하기도 해서 도착할 때는 잠을 깨고 반겨줘야지 생각했다. 가장 먼저 실내에 들어온 것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같은 연대라 얼굴이 익숙한 키 작은 훈련병이었다. 평소에도 좀 까불까불 해 보이는 친구였는데 수류탄 사격이 재미있었는지 엉덩이 춤을 추며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쟤 26 연대 아닙니까?” 뭐가 그렇게 신날까 쳐다보고 있는데 아까의 훈련병이 다시 내게 물었다. “네 맞긴 하는데 다른 중대라 잘 알진 못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자기들끼리 뭐라 이야기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전라도 애들은 지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범 교육 때 예상보다 너무 커서 놀랐던 수류탄 폭발음이 이번에는 머릿속에 울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가 이내 멍해졌다. 옆에 앉은 강릉 출신의 동기를 보니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역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조금씩 깨어가던 잠이 흔적도 없이 달아났다.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있자 질문했던 훈련병도 어색했는지 이번에는 질문으로 말을 건넸다. “전라도 애들 같이 지내보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저 저 친구가 장난기가 많은 것 같다고만 대답하고 말을 아꼈다. 그는 별다른 호응이 없자 다시 자기 무리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사실 나도 고향은 전라도였다. 서울에 산지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서 기억이 희미하긴 해도 10살 때까지는 전라남도 순천에 살았었다. 물론 부모님의 고향 역시 전라도다. 그래도 달리 이상한 것 없이 공부도 곧잘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 봤자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말투는 농담처럼 가벼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유 없는 혐오와 편견들을 너무 가볍게 체화시키는 환경에 화가 났고 영향을 받은 그들이 안타까웠다. 20년 평생을 고향에서 자라온 그들에게 타 지역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편견들은 주로 위로부터 답습되어 온 것이다. 이유가 있었든 없었든, 시간이 지나 이제는 없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흐려진 상황일 텐데, 편견들은 그 무게를 인지할 틈도 없이 가벼운 문화로 퍼져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도 전에 편견이 마음에 자리 잡아 새로운 관계는 생길 수가 없어 보였다. 편견들로 인해 제한될 그들의 경험을 상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사실 나의 부모님도 지역감정이 섞인 발언들을 하실 때가 있었다. 서울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거의 하시지 않지만 내가 어릴 때는 경상도 사람은 어떻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하셨다. 나는 부모님 세대를 살지 않아서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원인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다 보니 부모님 세대가 가진 지역감정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변하는 시대에 대해 꾸준히 설명했고 부모님도 점차 생각을 바꾸셨다. 나는 이처럼 잘못된 편견들은 세대를 거쳐가며 약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락이나 힙합 음악이 악마의 음악이었던 때도 있었고 게임이나 만화는 인생을 좀먹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도 내 어릴 적에는 만연했다. 요즘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우리나라의 자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편견들이 하나 둘 깨지는 시대에 이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훈련병의 입에서 편견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타인을 속한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알아갈 때 주로 객관적인 정보들부터 우선적으로 수집한다. 그리고 수집한 정보들을 경험에 의해 채득한, 구획화된 고정관념에 대입하여 일차적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세세한 특성들을 관찰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굵직한 정보에서 시작해서 자잘한 특성들을 알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정확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유용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방법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반대로 해볼 필요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출신지역, 학벌, 직업에 대한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먼저 그가 어떤 습관을 지녔는지, 평소에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같은 자잘한 정보들부터 모아가는 것이다.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판단의 틀과 맞는 것을 확인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것이고, 틀린 점을 발견한다면 더 좋은 것이다. 적어도 더 다양한 판단의 틀을 갖게 될 테니 말이다. 또 운이 좋으면 나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 보는 시도도 똑같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동혁 시인의 시 <나 너희 옆집 살아>(『6』, 민음사, 2014)는 사소한 습관들의 기록이다. 시에는 옆집에 사는 너와 나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린 종종 같은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같은 소독을 하고 같은 고지서를 받고 같은 택배를 찾으며 (…) 옆집엔 노래하는 영웅이 있고 자전거를 복도에 세워두는 소년이 있고 국경일엔 태극기를 올리는 착한 어린이가 있어 (…)
가끔 난간 위에서 흔들리는 코알라처럼
바다의 지붕을 나무에 새기며
커튼을 걷으면 밀려오는 나쁜 나뭇잎을 먹어 치우며 같은 난간에 매달려 예민한 기류에도 함께 흔들리는 난
난 너희 옆집 살아


시를 읽고 있으면 서로의 옆집에 사는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다르지 않음을 찾아 하나하나 살피고 기록한 시인의 마음도 느껴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자신의 약한 면을 드러낸다. 난간 위에서 흔들리며, 커튼 너머의 세상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신을 고백하고 있다. ‘예민한 기류에도 함께 흔들리는 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태에 있다. ‘난 너희 옆집 살아’라는 마지막 문장은 유약함마저 똑같이 나눠가진 ‘우리’의 이야기이다. 같은 생활 같은 버릇 같은 슬픔을 나눠가진 ‘우리’는 서로의 옆집에 사는 사이다.


우리나라는 발달된 교통 덕분에 반나절이면 웬만한 지역에 다 갈 수 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나는 옆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언젠가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서로 닮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우리가 편견으로 인해 정말 아름다울지 모를 만남의 기회를 미리 끊어내지 않았으면 한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상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상함 너머에는 반드시 나와 닮은 점도 있다. 나는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관계의 큰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