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훈련소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훈련소는 때마다 수천 명의 훈련병의 기초군사교육을 책임지면서도 집단감염의 위험을 최소화해야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동선 불명의 훈련병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부터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훈련소의 문을 닫을 수는 없기에 훈련소의 운영을 두고 윗사람들은 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내가 입대한 20년 5월에는 코로나 시대에 맞춘 대응 매뉴얼이 그리 체계적이지는 못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훈련소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부족한 마스크 수량, 대체 불가능한 훈련 계획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훈련병들은 당시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주당 2매의 보건용 마스크를 지급받았다. 물론 매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생활하는 훈련병들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수량이었다. 하루도 안되어 흰 마스크에 누런 얼룩이 생겼고 헤져서 보풀이 일거나 끈이 끊어지기 일쑤였다. 체력단련, 각개전투, 포복 등 많은 훈련들이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한다는 지침 하에 일단 시행되었다. 마스크를 벗으면 혼나고, 쓰자니 지저분하고 숨이 가빠 훈련병들은 미칠 노릇이었다.
훈련 내용에 있어 상황에 맞추어 크게 양보한 훈련이 하나 있다면 오염상황 극복 훈련이었다. 줄여서 화생방 훈련이라고 부르는 훈련이다. 원래라면 가스실에 들어가 CS가스, 쉽게 말해 최루가스를 맡으며 방독면을 착용해야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밀폐된 공간, 보건용 마스크를 쓸 수 없는 환경, 기침 콧물에 의해 확산될 비말들을 생각하면 합당한 조치였다. 화생방 훈련은 간소화되어 실외에서 시간 내에 방독면을 착용하는 가상 시뮬레이션 형태로 진행되었다. 오염상황에 대한 이론적 내용을 간단히 배우고 훈련은 끝났다.
어려움은 전혀 없었지만 보람 역시 없었다. 일기에 써놓지 않았다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감흥 없는 훈련이었다. 입대 전 군필자 친구들에게 듣던 역동적인 훈련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편하게 할 수 있어 좋다는 생각과 동시에 너무 밋밋하게 끝나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필자 친구들이 화생방 꿀팁이라며 전수해준 내용들이 떠올랐다. 완벽하게 방독면을 착용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숨을 참을 것, 가스 입자는 미세한 갈고리 모양이기 때문에 씻어낼 때 얼굴을 비비지 말고 물만 열심히 뿌릴 것.
나는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면 항상 그에 앞서 관련 팁을 찾는다. 내가 어릴 때는 네이버 지식in이 그 역할을 주로 담당했고 요즘은 유튜브, 블로그, SNS 등 팁을 얻을 창구가 다양하다. 그만큼 일의 시작에 앞서 팁을 얻기가 쉬워졌다. 팁은 일종의 힌트같은 것이다. 일을 조금 더 쉽게 해주기도 하고 막다른 길에 당도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나는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물에 뜨는 팁을 유튜브를 통해 검색했었고, 오래 앉아있어 허리와 목이 아플 때는 통증을 줄이는 팁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팁은 이처럼 알아두면 좋은 지식 정도의 의미에서 최근에는 경험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로 발전했다. 신문의 토막 상식 칸에서 제한적으로 전달할 때는 핵심만을 담아야 했기에 지식의 의미가 강했다. ‘요리를 하다가 싱거우면 소금을 뿌리세요’ 같은 팁도 있었다. 지금은 분량의 제약이 없는 매체가 늘어나다 보니 팁은 ‘썰’이라는 개념으로 변화했다. 지식뿐 아니라 해당 상황에 처했을 때 심정적 변화가 어땠는지 등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아무래도 단편적인 요약 정보보다는 실감 나는 묘사가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법이다. 들어줄 시간만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이런 면에서 팁은 직접 경험한 지인으로부터 듣는 것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 내가 공감하기 쉬운 화법으로, 내가 궁금한 포인트들을 즉각적으로 짚어가며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군대에 가는 나에게 본인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몇 가지 해 주었다. 화생방 훈련도 그 중 하나였다. 지금은 최루가스를 버티기보다 최대한 빠르게 방어하는 쪽으로 훈련이 이루어지는데, 아버지 세 대 때는 직접 경험하고 버티는 것에도 꽤 중점을 두고 교육했던 듯했다. 최루가스가 가스실에 퍼지면 방독면을 쓰지도 않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해야 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가스를 마시며 체조를 하는 일도 흔했다고 했다.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하셨다. 화생방 훈련을 하면 어떤 고통이 따를지 미리 알려주는 일종의 팁이었다. 팁이자 생생한 경험이었고, 아버지만의 추억과 웃으며 이야기할만한 즐거움도 담긴 이야기였다. 물론 당시에는 엄청나게 괴로우셨겠지만 말이다.
코로나 시대에 축소된 훈련들을 하며 느끼는 장단점은 명확했다. 장점이라 할만한 것은 편해진 훈련으로 요약 가능한데, 이제 입대한 나로서는 이전 훈련이 어땠는지도 모르고 매일같이 착용하며 지저분해지는 마스크 탓에 마냥 편하다고 하기는 애매했다. 단점 역시 애매했다. 줄어든 소통, 방역 지침에 따른 불편, 지긋지긋한 마스크 정도가 단점이었으나 모두 장점과 단점의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쳐있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렇다 할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흙탕물에 뒹굴고, 다 함께 소리 높여 함성을 지르고, 눈물 콧물에 침까지 쏟아가며 만들 추억이 없었다. 순간 고통스러울지라도 후에는 우스운 추억이 될 경험들이 기회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겪게 될 힘듦을 나열하며 킬킬거리던 군필 친구들의 짓궂은 표정과 은근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추억에 잠긴 아버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친구들의 표정과 아버지의 눈빛에 나의 심심한 화생방 훈련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는 이런 식이었다. 추억이 되지도 않고 편리함이 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훈련소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있어 신경 쓰지 못했지만 바깥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하는 등의 거리두기 조치가 취해졌고 처음에는 편하고 좋았을지라도 갈수록 줄어드는 만남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했다. 여행도 만남도 시끌벅적한 술자리도 없는 하루하루는 이야기가 되기 힘들었다. 누가 먼저 경험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한꺼번에 겪고 있는 일에 꿀팁 같은 것이 존재하기도 힘들었다. 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우울감을 나눌 뿐이었다.
나는 코로나 이후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을 아마 그동안 빈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바삐 돌아다닐 것이다. 이 끔찍한 공백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나눌 말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한데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시기라는 생각은 꽤 흥미롭기도 했다.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새로울 것 없이 모두 같은 시기를 보냈다는 의미였다. 비록 심심하게 지나가버린 날들이지만 다 같이, 각기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고독과 공백의 시기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될 수 없어도 각자가 자기도 모르게 공감대를 늘려가며 조용한 연대를 이루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고 이 힘든 국면을 이겨낸 뒤에는 반드시 그런 경험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허형만 시인의 시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마지막 연의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황량하고 싸늘한, 겨울 들판 같은 코로나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이 시대를 비관하는 것이 주된 일이 되었다. 너무 낯선 상황이라 분석하고 타개할 생각에 골몰해있다. 그러다가 정말로 이 시기를 텅 비워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시대에 살고 있다. 나뿐 아니라 나의 지인 모두가, 국가가, 나아가 전 세계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면, 적어도 이 시기를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말처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서 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키울 것 없어 보여도, 실제로 이야기할 것이 하나 없다고 해도 우리 안에는 무언의 동질감이 자라나 있을 것이다. 모두의 마음속에 말없이 자라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따뜻함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한 시대를 보낸다면 다음 세대에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나만의 팁이라면 팁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