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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Mar 04. 2020

엄마, 나 키우면서 행복했지?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엄마의 삶

백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제 아기도 나도 새로운 세상과 역할에 익숙해져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백일 동안은 정신없음, 어찌해야 할 지 모름, 우왕좌왕의 연속이었다.(지금은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몸도 다 회복이 안된 상태에서 아기를 돌보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아직도 엄지손가락을 못 쓴다는 말, 임신했을때 못 먹어서 나를 낳으니 아기가 키는 큰데 비쩍 말라 있었다는 이야기, 젖이 안 나와서 분유를 먹여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빌리러 다녔다는 이야기. 여러번 들어서 지겹기만 했던 그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처럼 가난하지도 않고, 남편이 옆에서 같이 아이를 돌보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며 아이를 돌보다 문득 문득 많이 울었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 생각을 참 많이 했지만 무뚝뚝한 이 큰딸은 엄마한테 내색 한 번을 제대로 못했다. 그저 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일하러 간 게 내가 몇 살 때인지를 물어봤을 뿐이다. 내가 돌이 갓 지났을 때 아빠는 사우디에 갔고, 그 뒤 엄마 혼자 3년 동안 나를 키웠다고 했다. 저녁에 나를 업고 골목을 나오면 집집마다 창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울먹이며 엄마는 말했다. 나는 이제껏 왜 이런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금에서야 그때 일하러 간 아빠의 심정, 혼자 남아 나를 키운 엄마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그게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만 겨우 해볼 뿐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의 스틸컷


처음 얼마 간은 아기를 돌보면서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며 늘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아기의 미소를 보다가 엄마도 나를 키우면서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기를 키우면서 힘들지만 행복이 훨씬 더 큰 것처럼, 엄마도 그랬을 거란 걸 알게 됐다. 이제까지 난 엄마를 늘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먹고 살기 위해 여러 장사를 하면서 힘들게 일했고, 시부모와의 불화로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가난 속에서 쉴 틈 없이 일하면서 아이 둘을 키웠고 등등 나에게 엄마는 힘든 인생을 산 불쌍한 사람이었다. 특히 내가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깊이 공감이 돼서 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다. 엄마는 가난 속에서 힘들게 산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했지만 자식 둘을 잘키워낸 훌륭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기를 키우기가 녹록치 않았겠지만, 또 그만큼 아기로 인해 기쁨도 크지 않았을까. 힘들다가도 아기의 미소 한 번으로 살아갈 힘을 얻지 않았을까. 자신을 쏙 빼닮은 딸이 웃고, 걷고, 말할때 얼마나 행복했을까. 엄마는 내가 3.8kg로 아주 크게 태어났고, 아기 때 하도 많이 먹어서 자다가도 몇 번을 깼어야 했었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나는 기억도 할 수 없는 그 옛날 얘기를 왜 그리 자주 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태어났을때, 내가 분유를 많이 먹어 엄마를 힘들게 한 그 때가 엄마한테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걸 알겠다. 나의 아기때 얘기를 하는 엄마의 표정이 왜 그리 환했는지를 알겠다.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다. 엄마가 나를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또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다. 엄마가 나로 인해 얼마나 행복했을지를.


엄마를 불쌍하다고 생각했을때는 엄마를 떠올리면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힘들게 나를 키워준 엄마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늘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 관계에서 어느 쪽이든 부담이 있으면 부담만큼의 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면서 엄마와의 거리가 조금씩 생겼다. 보답해야 하는 엄마인데 엄마와 거리가 생기니 또 죄책감 드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혼자서 엄마가 불쌍하고 미안하고 하지만 엄마한테  어떤 표현도 못했다. 엄마의 존재가 나에겐 너무 무겁고 그러니 관계도 무거웠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보니 엄마는 고생은 좀 했지만,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아이 둘을 키운 힘으로 세월을 잘 지내온 행복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행복했고, 지금도 나로 인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한결 더 행복해졌다. 내가 엄마에게 행복을 준 존재라는 것이, 그리고 엄마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엄마를 생각하면 느끼던 부담도 조금은 덜어진 것 같다. 이걸 왜 진작 몰랐을까.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한 일이 나와 동생을 낳은 일이라던 말이 부담으로만 들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건 나와 동생이 엄마에게 행복이란 말이었다. 이젠 내 아이로 인해 행복한 나와 나로 인해 행복한 엄마가 만나서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무뚝뚝한 나로선 쉽지 않지만 그래도 용기내서 한번 물어봐야겠다.


엄마, 나 키우면서 행복했지?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지만 행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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