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에는 밖에서 식사하면 안 돼?”
아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선뜻 나온 나의 대답에 아내의 눈이 둥그레 졌다.
“정말?”,
“어머님이 싫어하시지 않을까?”
“글쎄, 어쨌든 내가 책임지고 허락받을 께.”
재차 내 뜻을 확인한 아내는 모처럼 기뻐 좋은 표정을 지었다.
아내는 백화점 의류 매장을 운영한다. 거의 쉬는 날이 없다. 백화점의 정책으로 이번 추석 연휴에도 당일을 제외하곤 문을 연다. 평상시에는 직원과 교대로 휴일을 정해 쉬지만 명절 때는 직원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히려 쉬기 어렵다. 그래도 매년 어떻게든 명절을 준비했는데, 이번에는 영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명절에 드리는 차례나 조상님을 기리는 제사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고 예절이다. 그 유래는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유교가 들어오면서 조상을 추모하고 예를 갖추는 문화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면이 있다. 제사는 지배자들의 통치 수단으로 기능했다. 일국의 왕은 제사장의 권위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고, 한 집안의 가장도 가부장적인 힘을 갖는 방편으로 활용했다. 또 한편으로는 떨어져 사는 가족을 모이게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멀리 사는 가족이 한날한시에 모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의미가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 유래와 의미가 어찌 되었든 간에 뿌리 깊은 전통의 힘으로 가족은 명절이 되면 한집에 모인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을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즐거운 명절은 구호일 뿐이고, 고통스러운 명절이 되는 경우가 많다.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예민해지고 급기야 국지전이 일어난다. 때론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사상자가 발생하고야 만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반가움을 나누고 서로를 응원해야 하는 명절이 전쟁터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는 명절의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아예 가족이 모이지 않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때에 오히려 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은 그 의미가 더 커질 수 있다.
아내는 말이 나온 그날부터 마치 속보를 내듯 여기저기에 소식을 전했다. 아마도 내가 말을 뒤집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아내의 주변 반응이 뜨거웠다. 좋겠다. 부럽다. 남편 대단하다. 다행히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고생하는데 힘 빼는 얘기가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다. 살짝이지만 '잘한 일인가?’ 하는 걱정도 된다.
당일에는 돼지갈비 집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 집에 모여 송편과 식혜를 먹기로 했다. 모처럼 만난 형제, 삼촌, 사촌들과 수다를 떠는 즐거움과 가족 공동체로써 단합 대회를 잘 마친 느낌을 갖게 된다면, 이번 결정은 잘한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