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면도크림은 젤형으로 한 통을 다 쓰면 속이 텅 비게 되지만, 그래도 5번 이상은 사용이 가능하다. 그런 상황이 되면 언제 끝이 날지 몰라 또 하나의 면도젤을 옆에 가져다 놓고 그때를 미리 대비한다. 얼마 전엔 샤워부스에서 있는 면도젤의 양이 간당간당해 목욕 가방에 별도로 넣어 둔 얼마 남지 않은 면도젤을 추가로 샤워부스에 가져다 놓았다.
어느 날 동네 목욕탕에 가기 위해 면도젤을 챙기는 중에 샤워부스에 있었던 면도젤 한 통이 사라져 버린 걸 알았다. ‘아마 아내가 청소하는 과정에서 버렸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목욕 가방에 남은 면도젤을 넣고 동네 목욕탕에 갔다. 목욕 중에 면도젤을 쓰려는데 면도젤이 찔끔 나오고 끝이 나는 게 아닌가? 갑자기 당황스럽고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이왕 버리려면 거의 다 쓴 것을 버려야지. 그걸 구분하지 않고 버리면 어떻게 해?’라고 듣지도 않는 아내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처음엔 이번 문제의 책임이 아내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버린 것은 잘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 통으로 보이는 면도젤이 2개 있는 상황에 대해 미리 얘기하지 않은 것은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아내 입장으로 보면 다 쓴 통을 버린 것은 집안을 청소하다가 생긴 일인데, 열심히 일하고 싫은 소리 듣는 꼴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이 일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결론이 났다.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자기 말이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상대방을 탓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넘기고 그에게 변화를 주문한다. 그렇게 하면 언뜻 소통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오히려 신뢰가 깨지고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전달에 실패한 나의 책임을 인정하고 나의 소통 방법을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커진다.
다음부터는 면도젤 교체기 상황에 아내가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표시하거나, 미리 말해야겠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열심히 해도 잘못한 것만 보인다고 하는데, 이번 일로 아내가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됐다. 여러모로 무심한 난, 아내의 수고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