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큰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거리지만 아내의 모습이 또렷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아내도 웃는 표정을 지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사실 아내와 나는 아침 일찍 서울에 갔다가 점심 무렵 돌아오는 길이다. 다행히 버스와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있어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건 좋았는데 붙어 앉은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말다툼이 시작됐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함에 짜증이 나고 다시 말이 안 통하는 악순환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말싸움이 이어졌고 화를 삼키느라 표정이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린 후에 나는 문방구로, 아내는 길 건너편 반찬가게로 흩어졌다. 조금 후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된 것이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조금 전까지 말다툼하느라 답답하고 짜증이 나 화가 났는데, 잠깐 후에 아내와 나는 길 건너에 있는 서로를 보면서 왜 반가운 마음이 생겼을까?
아마도 거리 때문인 것 같다.
거리란 어떤 사물이나 장소가 공간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수치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와도 관계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신경심리학자 Michael Graziano 교수는 개인에게 필요한 거리로 가족과 같이 친밀한 관계에서는 46cm,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 간에는 1.2m, 공적 관계의 사람 간에는 약 3.7m라고 했다. 그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불편한 감정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간사해서 가까워지면 밀어내고 멀어지면 끌어당긴다. 밀당의 원리는 거기서 나온다.
혼자는 외롭고 둘은 괴롭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관계의 딜레마를 잘 표현해 준다. 공감되는 말이지만 그걸 참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외롭거나 괴롭거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좋지 않다. 표현을 뒤집으면 혼자는 자유롭고 둘은 즐겁다가 된다. 혼자이고 싶을 때와 함께 하고 싶을 때를 구분하여 조절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자유롭거나 즐겁거나가 되어 항상 좋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혼자의 시간을 인정하고, 둘이 함께할 시간을 합의하면 된다.
“나는 오늘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할 일이 있으니까, 없다고 생각해 줘. 11시부터 트로트 방송 함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