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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May 28. 2020

사랑에 관한 소고(小考)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를 읽고 - 보고 듣고 말하기 #6

사랑이란 무엇인가. 대상의 본질을 묻는 일은 어딘가 공허하다. 감정이나 지각과 같은 추상의 영역을 정의하는 일일수록 그렇다. 대상을 명확히 규정하면 할수록 모호해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인가. 흔히들 “00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00은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는 한다. 응당 그 답은 특수한 조건과 상황에서 사실이되, 보편적 진실이 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신학자에게 던진다면 구원에 관하여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질문을 천체 물리학자에게 던진다면 우주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식을 찾는 일의 스릴을 듣게 될 것이다. 사랑이 무어냐고 묻는 질문은 위험하다. 무수히 많은 버전의 사랑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될 테니까. 백 명에게 물어 백 가지 대답을 듣는 것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사랑은 무엇일까, 무엇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길 바라고 있는 걸까.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머나먼 곳으로 떠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사랑의 열병도 결국은 지나가고야 만다. 한때의 정념이 남긴 흔적을 더듬을 때,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눈이 멀고 입이 막혔음을 알게 되고, 세상과 너무 외따로이 떨어져 있지는 않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오직 사랑만이 사랑에 빠진 자의 구원이 될 수 있다. 끝내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한 자만이 사랑으로부터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든 사랑은 불시착하기 마련이다. 연애담이란 결국 사랑이 실패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실패한 사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화되거나 잊힌다. 대저 사랑은 실패를 예정하고 시작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끝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군다. 미화와 망각은 사랑을 매듭짓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자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하는 위안이다. 아름다운 부분만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양극단의 선택 외에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구원해줄 방법은 없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사랑이 산산이 깨지고 나서야, 사라진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사랑과 함께 떠나보낸 이와 영영 마주하지 못할 것이란 슬픔에 휩싸인다. 그래서 때에 따라 사랑은 불시착하는 바로 그 순간,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이런 까닭에 어떤 이들에게 파국은 남은 생을 버틸 힘이 된다. 

(중략)

그는 막 모험을 마치고 돌아왔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머나먼 곳으로 떠나라 유혹하고, 그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에게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고, 우리를 다녀오지 못한 또 다른 곳으로 떠민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여정이 시작되는 고통과 좌절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자신이 떠나보낸 것이, 부정한 것이 무엇이었음을 깨달은 자는 사랑의 불시착을 온몸으로 겪는다. 찰나를 밝힌 성냥개비처럼, 빛이 환할수록 상흔은 더욱 짙게 남는다. 그렇게 사랑의 파국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남은 생을 버틸 슬픔을 얻는다.  / 박경섭, 「사랑하는 남자들」



사랑이 꼭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무엇인 사랑’은 곧잘 고통으로 이어진다. ‘삶의 의미, 존재의 이유’ 등의 수식어로 형용되는 무엇인 사랑은 덧없을 따름이다. 사랑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출발과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파멸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사랑을 무엇인가로 만들려는 추동은 죽음에 반하는 생의 의지와 유사하다. 사랑이 무엇이길 희망하는 바람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곧잘 지겨워지고, 번번히 두려워지고 마는 생에서 건져내줄 구원자로서의 사랑을 찾아 나선다. 사랑을 따라 나선 길은 미로와 같아, 종래에는 애타게 출구를 찾게 됨에도.     



나는 사랑에 무능력했던 나의 경험들이 사랑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간 이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을 멜로로 연결 짓고 식상해하던 습관이 사랑에 대한 결례라는 걸 우선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사랑의 내부에 매복해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이 겹겹이 덧씌워진 채로 사랑은 본래의 얼굴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 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 왔던 것이다. /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이 어두컴컴한 미지의 영역일 때, 나는 사랑을 꿈꾸었다. 지고한 믿음과 생을 밝혀줄 낭만으로서 사랑을 그려왔다. 몇 번의 실패와 몇 번의 불발을 겪고, 나는 나이든 만큼 사랑에 냉소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애당초 그런 게 가능하냐고 되물으며. 누군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를 물어보면, 한참을 뜸들이다 몇몇 작품을 꼽은 뒤에 굳이 로맨스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여 답하던 때도 있었다. 너무 유치하지 않느냐며 짐짓 사랑에 초탈한 것 마냥 굴었다. 기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 성공하였든 실패하였든, 혹은 사랑의 결말이 어떠했다고 말하기 애매한 그 모든 로맨스를 사랑한다. 다만 더 이상 로맨스만을 꿈꾸지는 않는다. 선망과 냉소를 거쳐 나는 모든 사랑이 로맨스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로맨스는 사랑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을 대상화하고 신비화 하는 이는, 결국 사랑을 수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에 빠졌다고 환희하며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최승자, 「문명」 中 



사랑을 말하고 싶다면, 우리는 너와 나의 사랑에 어떤 것을 더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도 뺄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사랑을 둘러싼 그 모든 수식어를 덜어낼 때, 우리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 움큼의 사랑과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어수선하게 그려낸, 지리한 사랑의 궤적이 부끄러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을 말해야 한다면 무엇을 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가장 초리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서 사랑을 지켜봐야 한다. 나의 사랑이 그리 대단하지 아니하다는 걸 배워야만 한다. 자신의 사랑을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이 만이 타인이 주는 사랑을 보듬어 키워낼 수 있기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는 순간에야 현현한다. 사랑함만이 사랑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함이 멈추었을 때,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사랑의 부재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남은 이는 사랑하였음에 후회와 탄식을 내뱉는다. 한탄 속에 사랑은 존재한다. 흔적으로. 


사랑의 반대가 이별이 아니고,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이별로 다시 태어난 것임을. 그리하여 잘 이별하는 것 역시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이별을 고하고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서두를 때, 너와 내가 나누었던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뜻 모를 자취만을 두고 떠나버린 걸까. 사랑이 남긴 빈자리를 다른 사랑으로 채우는 일은 불가하지만, 사랑이 남긴 빈자리는 언제나 사랑의 존재를 믿게 하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언젠가 사랑이 있었음을. 순간의 진심이 때때로는 평생의 신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사랑이 몰고 온 파국에서 우리는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여야만 한다. 잠시 냉소를 머금게 될 지라도, 불시착을 견뎌낸 이는 사랑이 부재 속에 피어나는 현현의 순간을 오롯이 마주할 것이다.



카페 아바나     

카페 아바나에 가면 붉은 휘장이 쳐진 무대엔 여섯 명

의 악사들이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를 연주하고 무대의

오른쪽 벽엔 체 게바라의 초상이 걸려 있지 마가목으로

만든 테이블엔 루머가 있고 비파나무 의자엔 장 드 파가 

앉아 있지 피아노 앞 테이블엔 욜이 홀로 앉아 무대를 바

라보지 늙은 가수는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사랑 같은 건 옛날에 다 했지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우

리는 그저 술 한잔 마시기 위해 카페 아바나에 들렀지 늙

은 가수 뒤에선 그로쏘랑 루이가 춤을 추네 춤을 추며 말

하네 노래 같은 건 옛날에 다 불렀지 카페 아바나에 가면

무대의 왼쪽 벽엔 희미한 가스등이 걸려 있고 야외 테이

블엔 항갈망제에 취한 시코쿠가 앉아 중얼거리지 술 같

은 건 옛날에 다 마셨지 카페 아바나에 가면 체리 핑크 맘

보가 있고 주인장 초이는 카운터에 앉아 가끔씩 존다네 7

번 테이블에 앉은 옥은 한잔의 술을 마시며 말하지 오늘

은 내 인생 최고의 날 졸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 잠 같은

건 천년 전에 이미 다 잤지 카페 아바나는 영혼의 동지들

이 모이는 곳 아마도 우리는 그저 술 한잔을 마시기 위해

그곳에 들렀지만 거기엔 인생의 친구들이 다 모여 있었

지 무대 위 늙은 가수는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

는 말하지 사랑 같은 건 옛날에 다 했지     

                                       박정대, 「체 게바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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