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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어 Jan 06. 2020

2019년 9월. 맥주를 마시는 데 필요한 조건.

#월간안전가옥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돌아보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여기에 다시 포스팅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은 조금 수정했다. 



4년 전 이맘 때, 유럽에서 신나게 연차를 소진하고 있었다. 독일 뮌헨에서 시작해서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를 갔다가, 다시 독일의 베를린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할슈타트는 동행이 보고 싶어한 곳이었고, 베를린은 힙스터들의 도시라니까 가봐야 할 것 같았고, 뮌헨엔 맥주를 마시러 갔었다. 


독일 뮌헨에서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열리는 옥토버페스트에 가 보는 게 이 휴가의 가장 큰 목표였다. 비어텐트라는 게 있다는데, 그게 진짜 우리가 아는 ‘텐트’는 아니고 가건물 같은 거라던데, 독일 맥주는 파울라너랑 에딩거 밖에 모르는데, 저녁에 가면 자리가 없어서 테이블 예약을 해야한다던데 정말 그럴까 사진으로 보면 진짜 넓던데, 동양인 여자애들이라고 차별하겠지 등등 걱정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토버페스트에 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물론 내가 술쟁이라는 이유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이게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해봐야 3천 명, 그것도 얌전하기로 소문난 사람들만 오는, 서울 못지 않게 인프라가 갖춰진 도시에서 하는 행사로도 허덕이는데. 진짜 술고래들만 몇 만 명이 동시접속하는 그런 ‘페스트’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걸까. 


결론적으로, 나는 옥토버페스트에서 멀쩡히 잘 놀고 잘 살아 돌아왔다. 물론 아무도 선뜻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드넓은 비어텐트를 불쌍한 표정으로 정처 없이 걷는 시간도 견뎠지만 결국에는 초면의 벽안 친구들과 의자 위에 올라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모르는 독일 노래를 따라 부르(는 척하)며 놀았다. 노는 와중에도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옥토버페스트에는 역시 맥주를 마시러 왔으니, 맥주는 어땠는가 하면. 


내가 맥주를 마시기 전에 살피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춥지 않을 것, 두 번째는 깨끗하고 가깝고 안전한 화장실. 일단 첫 번째 조건은 Fail이었다. 동행했던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바이에른 주 전통 의상 ‘딘들’을 사 입고 갔었는데, 입어보니 코르셋이 흉통을 잔뜩 조이고 가슴은 썰렁하니 내놓게 되는 옷차림이었다. 10월 초의 뮌헨은 꽤 쌀쌀했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아니.. 어떻게 이러고 찬 맥주를 마셔.. 한 잔 놓고 기분만 내다 오겄네..’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리에 앉는데 너무 고생을 한 나머지 앉자마자 입에 댄 맥주는 세상에,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머물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가 줬던 딘들. 딘들은 보기엔 레이어드 같은데 입으면 레이어드가 아닌 기묘한 옷이다


그래서 이제 화장실. 화장실 어떡하지. 너무 별로일 거 같은데. 이 술고래들 아침부터 마신다던데 그럼 지금쯤 어떡하지. 바깥엔 살벌한 놀이기구들도 있던데 술 마시고 그거 탄 사람도 있을텐데, 맥주는 너무 맛있는데 어떡하지, 포장해서 숙소가서 마실 방법은 없나. 생각들이 무작위로 튀어오르면서, 수십 개의 테이블 사이를 지나 화장실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4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순간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화장실은 붐비고 쾌적했다. 두 형용사가 공존할 수 있는 거였나? 화장실은 넓었고, 쓸모없는 공간 없이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족하지도 않았고, 더럽지도 않았고, 더러워지면 누군가 등장해 빠르게 치우고 사라졌다. 통로엔 상주하는 직원이 있어서 로봇처럼 빈 칸을 정확히 찾아 대기줄을 빠르게 줄였다(SRT 수서역 화장실의 모니터보다 효율적이었다). 잔뜩 취기가 오른 머리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든 파트가 각자, 또 함께 완전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드넓은 텐트를 누비며 정확히 오더를 챙기는 직원, 흥은 지켜주지만 취객은 적절하게 관리해주는 씨큐리티. 이 많은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 라이브 밴드, 그리고 독일어도 할 줄 모르고 울상이 된 두 명의 관광객들의 자리를 살뜰히 챙긴 친절한 취한 아저씨와 관광객들을 옆에 앉히고 같이 놀아준 열린 마음의 취한 젊은이들.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나를 비껴 간 그 날의 불운들도. 좋았던 기억은 의도하고 의도하지 않은 요소들의 팀웍으로 만들어진다. 


성격검사 류의 테스트를 하다 보면 흔히 나오는 질문 중에 ‘혼자 일하는 것’과 ‘함께 일하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가 있다. 오만하고, 내 능력을 맹신하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지 못했던 시절에는 무조건 혼자 일하는 것을 택했다. 난 남들에게 잘 못 맡겨, 내가 직접 다 확인해야돼. 좋고 나쁜 경험을 거쳐 이제는 나는 함께 일할 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함께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주를 마시기 전에 확인하는 조건들처럼, 일을 잘 하기 위해 혹은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좀 더 뚜렷하게 그려보게 된다. 항상 더 배울 것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중요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래서 오래 살고 볼 일 인건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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