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안전가옥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돌아보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여기에 다시 포스팅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은 조금 수정했다.
나는 가끔 혼자 끊임없이 말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 맥락을 이해하려면 엄청나게 세세한 디테일들을 알아야 해서 무한대의 배경 정보를 전달하느라 그럴 때도 있고, 이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요 이야기도 알아야 하는데 하는 식으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다가 대서사시를 만드는 바람에 그럴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이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코 앞에 지나간 고양이 때문에 지난주에 본 고양이 얘기를 시작해서 정작 하려던 얘기는 고이 접어 넣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좋아한다. 한 사람이 나와서 자기가 겪은 일이나 생각을 관련이 있는 듯 없는 듯 느슨하게 엮어서 길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 하나의 관통하는 주제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잠깐 한눈을 팔더라도 돌아와서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되고, 다 듣고 나면 아- 하는 그런 이야기.
넷플릭스에는 꽤 많은 스탠드업 코미디 쇼가 있다. 그중 아주 적은 수의 쇼만 겨우 봤지만, 이 수많은 스탠드업 코미디들 모두 ‘무엇보다도 발화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제가 무겁건 가볍건 그 사람이 경험한 것이 무조건 들어가니, 그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발화자 개인의 젠더, 인종, 나이, 환경에 따라 보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폭도 판이하게 달라진다. 소설이나 영화도 작가나 감독의 관점이 들어가지만 그 관점과 메시지 겉을 수많은 비유와 서사와 상징으로 두텁게 바르다 보니 창작자 개인의 특성은 좀 옅어지는데, 스탠드업들은 창작자의 아이덴티티가 곧 쇼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의 쇼 전체에 100퍼센트 공감하지는 못하는 때도 많다. 한국 혹은 동북아시아에 사는, 여성, 비혼, 30대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넷플릭스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라이자 슐레싱거의 ‘엘더 밀레니얼’을 보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에 공감하지만, ‘그건 당신이 미국에 사는 백인(+미인)이라 그런 거 같은데요’ 하는 지점도 있다. 아시안-아메리칸 여성으로서 만삭의 몸으로 직구를 던지는 앨리 웡이 아시안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이나 편견에 대해 이야기할 땐 끄덕끄덕 하다가도 디테일한 출산과 육아 이야기가 나오면 괜히 어색해져 버린다. 이쯤 되니 존 멀레이니 같은 커리어 탄탄한 1세계 백인 남성의 넋두리는 ‘그래요 님도 힘든 일이 있겠지' 정도고 세스 로건쯤 가면 그냥 진짜 코미디쇼를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발화자 개인이 곧 쇼의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에,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더 다양한 배경의 코미디언들에게 ‘무조건'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소외된 우리들이 ‘이 감정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느끼고, 하루 더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서.
한 때 여성의 서사를 여성이어야만 만들 수 있다는 입장은 상대를 이해하고 상상해보기 싫은 게으른 남성 창작자들의 핑계라고만 생각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다 보니, 여성의 서사를 만드는 데엔 훨씬 쉬운 방법이 있었고,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 많은 여성 창작자들이 다양한 여성의 서사를 만들 수 있게 발굴하고, 지원하고, 소비하는. 쉽고도 쉬운 길.
이상 8n년생 클레어 초이였습니다. 굿나잇 에브리원!